ADVERTISEMENT
오피니언 그때 오늘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식민지 조국 하늘을 날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안창남은 1923년 오쿠리비행학교의 의뢰로 일본 정치가 호시 도루를 추모하는 인쇄물을 공중 살포하던 중 도쿄 인근 논바닥에 추락했다. 추락한 뒤에도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포즈를 취했던 그는 1925년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30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일본 『역사사진』 1923년 8월호)

1922년 12월 10일, 여의도에 5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도쿄 오쿠리비행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로 비행사가 된 안창남의 ‘고국 방문 대비행’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서울과 인근의 각급 학교는 아예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을 내보냈으며, 철도국은 ‘비행열차’를 편성하여 할인 요금으로 운행했다. 경성전기주식회사도 전차 운행 횟수를 늘려 관중 동원에 협조했다. 경성악대(京城樂隊)의 주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여의도 간이 비행장을 이륙한 ‘금강호’는 서울과 인천 상공을 선회한 뒤 무사히 착륙했다.

안창남은 이때의 비행 소감을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으로 정리해 잡지 ‘개벽’에 기고했다. “비행장에서 1100m 이상을 높직이 뜨니까 벌써 경성은 들여다 보였습니다. 뒤미처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남대문이었습니다…. 독립문 위에 떴을 때 서대문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위에 뜬 것으로 보였을 것이지마는,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 주었을는지….”

안창남의 비행 이후 세간에서는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의 자전거”라는 노랫말이 유행했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체제는 일상적인 민족 차별의 체제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의 매일같이 ‘자존심의 손상’을 겪었다. 손상된 자존심을 한순간이나마 회복시켜 주었기에, 안창남은 곧바로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안창남 스스로도 서대문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 ‘형제애’를 느꼈다. ‘함께 차별받는 민족’이라는 이름이, 평상시 길거리에서 만났더라면 서로 외면했을 사람들에게 ‘교감’의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오늘날 김연아나 박태환·박지성 같은 스포츠 스타들은 한국인들이 ‘민족’의 이름으로 소통할 기회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안창남의 후예인 셈이다.

안창남의 비행이 한국인들에게 선물한 것은 ‘자존심’만이 아니었다. 그가 금강호에서 뿌린 전단에는 “비행기의 발명, 항공기의 발달은 이제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케 하고 있습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의 기고문을 통해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관점’을 새로 얻음으로써 한국인들은 비로소 3차원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평지에 마주 서면 ‘대립’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조감’이다. 그러나 비행기가 일상화한 오늘날에도 2차원 공간에서 대립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