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빨갱이' 런던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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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런던시장에 당선된 켄 리빙스턴은 '빨갱이 켄' 이란 별명대로 영국 노동당의 좌파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

두달 전 노동당 시장후보 경선에 불복, 무소속으로 출마해 차점자의 두배, 노동당 후보의 네배를 득표하며 압승을 거뒀다.

경선불복이라면 우리에게도 낯익은 일이지만 리빙스턴의 경우는 좀 다르다.

원래 노동당은 좌익정당인데 블레어 총리가 당수가 되면서 '제3의 길' 을 표방, 중도노선을 취했다.

블레어의 신주류와 리빙스턴 같은 '전통적' 노동당원 사이에는 정책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깊은 골이 있다.

신주류가 리빙스턴을 탈락시키기 위해 너무나 복잡한 경선과정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리빙스턴이 유권자 지지에서 앞서고도 경선에서 패퇴한 뒤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자 여론도 리빙스턴을 지지한 것이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 놀랍게도 런던의 시장선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여의도의 3분의1 면적인 중심부의 '시티 오브 런던' 에는 시장이 옛날부터 따로 있지만 임명직이다.

1964년 대(大)런던이 만들어진 후 시장 없이 평의회가 행정을 맡다가 86년 그나마 폐지되고 32개의 구(區)가 지방자치를 담당했다.

리빙스턴이 거물로 자라난 것은 바로 대런던 평의회에서였다.

81년 평의회에 진입하자마자 그는 대중정치를 무기로 의장직을 차지하고 별별 희한한 정책을 다 내놓았다.

전철과 버스요금을 대폭 깎은 것은 그렇다치고, 반전(反戰)시위 참가자들의 편의를 위해 탁아소를 만드는가 하면 북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시청사 정면에는 실업률 상황판을 대문짝만하게 걸어놓고 지붕위에는 붉은 깃발을 휘날렸다.

당시 대처의 보수당 정권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니 평의회 폐지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번 시장선거는 국가권력의 지방분산을 추구하는 블레어 정부의 '퇴화(Devolution)정책'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구의 권한이 크기 때문에 런던시장의 실권은 별 것 아니지만, 직접선거로는 가장 큰 선거구에서 뽑는 자리이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가 크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놓고 리빙스턴에게 빼앗겼으니 블레어로서는 죽 쒀서 누구 준 셈이다.

일본 도쿄(東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지사가 말 막하는 버릇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힐러리와 상원의원 자리를 다투는 미국 뉴욕의 줄리아니 시장 또한 독불장군으로 명성이 높다.

경찰폭력 두둔으로 비난을 모으지만 시민들에겐 그의 '치안제일주의' 가 대인기다.

"국제자본주의는 히틀러 못지 않게 많은 사람을 죽인 학살범" 이라고 공언하는 리빙스턴 역시 그 대열에 손색이 없다.

대도시 유권자들에겐 이런 강렬한 카리스마가 잘 먹혀드는 모양이다.

점잖은 시장을 가진 서울시민들이 부러워할 일인지, 딱하게 생각해야 할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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