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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 '워터게이트 아이들'의 반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번 총선에서 많은 신인정치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과거와 같은 거수기 노릇은 안하겠다" "크로스 보팅(자유투표)을 하자" 는 새 목소리들을 내고 있다.

반면 중진들은 "나도 옛날엔 그런 말을 했었지…. 교육 좀 시켜야겠다" 는 등 아직 무얼 잘 모른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느 나라든 초선(初選)보다 다선(多選)이 더 영향력을 갖는 의회 시스템에서 초선이 선배들을 제치고 분위기를 주도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특수한 시기의 정치환경 때문에 갑자기 초선의 숫자가 늘어나고 그들이 단결된 모습을 보일때 의외의 힘을 발휘한 예가 있다.

미국에서 초선의원들이 대거 당선된 적이 근래에 두번 있었다.

1974년 선거에서는 민주당 출신 초선의원이, 20년 뒤인 94년 선거에는 공화당 신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 두 그룹은 시차가 20년이나 나고 이념적으로도 반대의 성향을 가진 초선들이었지만 이뤄낸 업적은 매우 유사했다.

워터 게이트사건으로 구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낀 미국민들이 74년 선거에서 민주당 출신 신인 75명을 당선시켰다.

현역의원의 프리미엄이 절대적인 미국에서 이 때는 평균보다 두배 이상의 신인들이 당선됐고 사람들은 이들을 '워터 게이트 아이들(Watergate babies)' 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사명감과 의욕을 갖고 워싱턴에 입성했다.

그러나 철저하게 다선 위주로 운영되는 미 의회였기 때문에 이들을 보는 선배의원들의 시선은 거만하고 싸늘했다.

당시 국방위원장인 허버트의원은 초선들에게 '동료의원' 이라는 호칭 대신에 '제군들(boys and girls)' 이라고 하대(下待)할 정도였다.

이런 설움 속에서 이들은 똘똘 뭉쳤다. 의회가 개원하기 전에 초선들 만의 합숙 단합모임도 가졌다.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은 의회개혁이었다. 지금까지 다선 순서로 차지하던 분과위원장을 의원총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을 고쳤다.

당연히 '제군들' 이라고 불렀던 허버트 위원장을 포함해 3명의 붙박이 위원장들이 초선들의 반란으로 물러났다.

소(小)위원회도 민주화해 소위원장도 직접 선출토록 만들었다.

이들은 이념과 당파성을 초월한 입법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월남전이 한창일 때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풀뿌리운동가 출신이 많았다.

당연히 의원생활도 이데올로기에 경직된 태도를 보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뜻밖에 이들은 당시 민주당 중진들보다 더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모습을 보였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의원들은 노동조합 눈치를 보는데 이 초선의원들은 서슴없이 당의 기반인 노조에 등을 돌리는 투표를 했다.

정부의 지출로 사회복지를 실현코자 했던 민주당은 적자예산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들은 앞장서서 공화당 노선인 균형예산을 주장했다. 이들은 보수-진보라는 이념에 묶이지 않고 무엇이 문제해결에 최선인가에만 매달렸다.

94년에는 공화당 신인들이 대거 등장했다. 민주당 클린턴 대통령이 세금을 올리고 정부지출을 늘린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때 74년 규모와 비슷하게 73명의 공화당 출신 초선의원이 탄생했다.

'공화당의 혁명아(Republican Revolutionaries)' 로 불린 이들은 '워터게이트 아이들' 과 비슷한 개혁을 시도했다.

의원 특권을 없애는 입법과 함께 일부는 자발적으로 의원직을 3회 이상 연임하지 않겠다는 임기제한 약속을 하고 들어왔다.

누구의 감사도 받지 않던 의회의 회계를 독립기관으로부터 감사를 받도록 만들고, 로비의혹을 없애기 위해 소위원회까지 모두 공개토록 했다.

특히 행정부가 마음대로 세금을 못 올리도록 소득세율을 개정할 때는 과반수가 아닌 5분의 3의 지지를 받도록 규칙을 고쳤다.

놀랍게도 이들은 이같은 개혁을 개원일 당일에 해 냈다. 개원 첫날 새벽 2시30분까지 회의를 열어 이런 일을 해 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현실의 압력과 회유가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분야의 스타급들도 정치권에만 들어가면 금방 소멸돼 버리고 말았다. 모두 옆은 안 보고 위만 보고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예에서 보듯 초선의원간에 횡적인 단합을 하지 않으면 기존의 벽을 깰 수가 없다.

우리 의회 역사에 '16대 초선의원들' 이라는 별도의 장(章)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문창극 <미주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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