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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1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12. 어둔 시절의 흔적

술도 많이 마시면서 그렇게 약을 많이 드시는 고은 선생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특히 그 약들 중엔 예전 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을 때 당한 고문 후유증 약도 섞여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더욱 마음이 심란해졌다.

멀쩡한 사람도 잡혀가면 그렇게 모진 구타와 고문을 받아 몸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에 당시 정부에 대해 무조건적인 분노와 증오가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라치면 고선생께서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이게 내 훈장이여'라고 말씀하시며 '날씨가 조오치, 우리 어디 갈까'라고 화제를 돌리곤 했다. 세상엔 별일 아닌 것 갖고도 생색내는 사람이 지천인 판에 그 어떤 사람보다 모진 일을 겪고도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실로 감동을 준다.

그러나 내가 가장 큰 감격을 느낀 것은 종로 5가의 연강홀 개관기념으로 개최된 고선생의 시낭송회 때였다. 가끔 작가회의 행사 때 고선생이 시를 읽는 모습을 보았고 그래서 시낭송 솜씨가 보통이 아닌 줄 알고 있었지만 무대가 장중하고 화려하면 할수록 그 솜씨가 빛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다정한 연인의 귀에 속삭이듯 조용한 음성으로 시작하는가 하면 어느덧 거대한 광장에서 위대한 선지자가 미욱한 중생들을 깨우치듯 우렁찬 소리로 휘몰아쳐갈 때는 나도 모르게 전율하고 있었다.

"나는 방랑의 시대를 살았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내전으로 인한 폐허를 떠도는 자의 역사에 대한 무책임을 자유로 착각한 전후세대의 삶이었다.

허무가 내 청춘의 권리였다. 나는 6.25로 산에 들어갔고 4.19로 산에서 내려왔다. 역사는 이런 나의 삶에 각성을 요구했다. 그 요구를 발견했을 때의 나의 감격이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

이것은 고선생의 시집 '만인보' 앞에 있는 서문 중의 일부인데 그날 연강홀의 감격이 너무나 커서 평소 잘 보지 않는 책을 넘기며 내가 새로운 감동을 느꼈던 대목이다.

솔직이 말해서 고선생이 어쩌다 말씀하시는 날것의 육담에 질린 일이 없지 않았던 터였고 그러한 때 느끼는 이해불능의 어떤 것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그날의 감격 속에서 그리고 시집의 그 말들 속에서 말끔하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선생이 통과했던 저 허무의 시대 그리고 온몸에 상처를 지니고 이 현실을 살아가는 시대의 아픔이 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어른들의 구체적인 고통이 우리를 이만큼 살게하는 밑바탕은 아닐까 생각한다.

"야 그래도 고선생 너무하는 것 아녀. 그렇게 자고 나면 시집을 내니. "

"그러면 어뗘, '만인보' 나 '시여 날아가라' 를 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애기해도, 그렇게 많이 써도 실패한 작품이라고 말할 작품이 별루 없잖여. "

"그러니까 불가사의지. 그렇게 써도 실패작이 없으니 약도 오르고. "

"아 고선생이 감옥에 계시는 동안 이희승 국어대사전을 그냥 다 외우셨다잖아. 거기다가 결혼 이후 마음에 안정을 찾았으니. 오랜 산문(山門)생활에서 익힌 선시와 복잡한 인생살이, 거기다 그것에 살을 입힐 언어가 있으니 그렇게 봇물처럼 터질 수 밖에. "

"아무튼 괴물여,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 머리로는 이해 불능의. "

"성적 욕망과 창작의 관계를 연구혀보면 재미 있을 틴디. 고선생은 아직도 그것을 못참는댜."

어느날 김사인 이재무 현준만 강형철 이승철 박철씨 등 젊은 시인들이 나눴던 이야기의 몇 대목이다. 후배 문인들도 그렇게 알 수 없는 큰 어른이니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옛날 한 나라를 통틀어 소리 잘하는 사람을 명창이라 했다는데 고선생은 그럼 명시인쯤 되는 것일까. 고은 선생님의 건필과 건강을 빌고싶다.

한복희 <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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