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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피해자들 그림 그리기잔치 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생각대로 안되는구먼. 지금 살고 있는 마을을 그리고 싶은데…. "

지난 22일 오전 대구 동구 망우공원. 경남 합천군 원폭피해자복지회관에서 요양 중인 김재식(83)할머니는 크레파스로 하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게 쉽지 않다며 중얼댔다.

다른 할머니들의 그림을 훔쳐보기도 했다.

金할머니는 "난생 처음으로 그림을 그려본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에 간밤에 잠도 설쳤다" 며 웃었다.

이날 망우공원을 찾은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의 다른 할아버지.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한 홍의장군 郭막우당의 동상이 서있는 망우공원에서 대구 곽병원 주최의 노인 그림 그리기 잔치에 초청받아왔다.

복지회관에는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할아버지.할머니 77명이 요양 중이다.

이들 가운데 외출이 가능한 11명(할아버지 3.할머니 8)이 참석했다.

할아버지.할머니들은 주최측에서 제공한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받아 따스한 봄햇살 아래서 동심(童心)에 빠져 내내 즐거운 표정이었다.

소학교만 졸업한 뒤 직장생활을 하다 18세 때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은 김일조(73)할머니도 산.마을.자동차.꽃밭 등의 그림을 그렸다.

복지회관이 있는 합천을 그린다는 金할머니는 "50여년만에 다시 쥐어보는 크레파스가 낯설다" 며 "소학교 때 봄소풍 나온 기분" 이라고 말했다.

이들과 함께 온 복지회관 사회복지사 김광혜(金光惠.43.여)씨는 "대부분 70대 이상으로 바깥 외출이 쉽지 않고 그림 나들이는 처음" 이라며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본 적 없다" 고 말했다.

이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대구 달서구 비둘기아파트에 사는 정신대 할머니 3명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신헌순(77)할머니는 "어릴적 손에 물들이던 봉숭아꽃을 그리고 싶은데 자신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그려달라고 했다" 며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다 정신대할머니들과 원폭피해 할아버지.할머니들 간의상봉이 이뤄졌다.

얼굴을 마주하기는 처음인 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원폭피해 할머니들은 "지금도 매년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6일 복지회관에서 제사를 지낸다" 고 했고, 정신대 이용수(73)할머니는 "히로시마 위령탑에 갔다왔다" 고 말했다.

해방된지 50여년이 지났고 여생이 얼마 남지않은 이들이지만 일제의 상처는 몸뿐만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원폭 투하로 히로시마에서 큰 아버지.형 등을 잃었다는 배인조(65)할아버지는 '끝없는 대화' 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여주며 떨린

목소리로 "원폭투하로 숨진 남.녀영혼이 끝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이라고 설명했다.

푸른 나뭇잎이 달린 고목나무를 그린 이용수 할머니는 "우리도 이제 나이들어 고목나무처럼 늙었지만 푸른 나뭇잎처럼 역사는 영원히 살아있다" 고 말했다.

안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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