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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나라 간 국경회담 결렬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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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10년께 간도 용정 거리. 한국인의 간도 이주는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간도 이주자가 계속 늘어나자 이주를 엄하게 처벌하던 정부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1900년 이후 중국인 비적들의 교민 습격이 빈발하자 교민 보호를 위해 관리와 경찰력을 파견하기까지 했다.(『민족의 사진첩』)

1885년 12월 3일 조선·청국 간 국경 회담이 20여 일간의 격론 끝에 결렬되었다. 회담 중 양국 대표단은 함께 백두산에 올라 정계비를 보고 천지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을 탐사했다. 그 결과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임을 확인했다. 조선의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정계비 문구대로 국경을 정하자고 했고, 청국 대표인 덕옥(德玉)은 두만강이 경계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국경 회담은 1887년에 또 한 차례 개최되었다. 이때 이중하는 이전 주장을 철회하고 두만강 최북단 지류인 홍토수를 국경선으로 삼자는 안을 제시했으나 청측은 최남단 지류인 석을수 안을 고집했다. 분쟁이 해소되지 않은 탓에 1899년에 체결된 ‘한·청 통상조약’에서도 국경을 명시할 수 없었다.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간도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대한제국 정부는 교민을 보호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했다. 이번에는 청나라가 국경 문제를 들고 나왔다. 1904년 양국은 “국경 문제는 양측 대표가 실사한 후 재론하되, 그때까지는 종전대로 하자”는 애매한 내용의 ‘선후장정’을 체결했다. 이후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1887년 당시의 청국 주장을 수용해 ‘간도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국경 분쟁을 임의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니 ‘간도협약’으로 간도를 빼앗겼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조선 정부가 1887년 회담에서 이미 홍토수를 경계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1712년 백두산 정계비를 세울 당시 현장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데 있었다. 조선 정부는 정계비를 세운 뒤 토축(土築)과 목책을 세우면서 비로소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실을 후일 청국 사신으로 온 당시 대표 목극등(穆克登)에게 알렸지만, 그는 문책이 두려워 이 일을 묵살해 버렸다. 그 후 1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양측 모두 백두산 정계비에 관한 일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간도협약은 이미 무효이다. 을사늑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중국 정부가 일제와 맺은 조약을 모두 무효화했기에 무효이다. 지금의 국경선은 1962년 조중변계조약에 따른 것으로, 간도협약 때의 선이 아니라 1887년 조선 정부가 주장했던 선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일만 기억하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인간관계에는 좋을 수 없다. 국제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북공정과 독도 문제에 올바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보는 눈은 냉철해야 한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