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세상보기] 총선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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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그 총선은 끝났다. 그 미친 마이크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 방자한 천연색 벽보들도 하나 둘 뜯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누구는 당선돼 길길이 기뻐 날뛰고 누구는 낙선했다. 그 더럽고 역겨운 잔치는 이렇게 끝났다.

비가 와야 한다. 기우제라도 지내야 한다.

그 총선 선거운동 내내 비 한방울 보이지 않던 무정한 하늘에는 어쩌자고 황사뿐이었다.

마를 대로 마른 산맥들은 산불이 번져 시커먼 초토가 되고 말았다. 논바닥은 쩍쩍 갈라지고 밭에서는 먼지를 풀풀 날렸다.

어디 한군데 촉촉히 젖은 데가 이 나라에는 없었다. 새 소리나 개 짖는 소리도 어지간히 지쳐서 목이 쉬었다.

이와 함께 총선으로 사람들의 심성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졌다. 살벌하고 비정하고 막가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는 선거를 치를 때마다 더 핏발이 서는 눈이고 더 깊이 가슴 속에 칼을 품은 원한과 적의가 쌓인다. 이제 비가 왔으면 좋겠다. 비가 와서 들녘이 파릇파릇 살아나야 한다. 모든 도시들의 풍경도 비가 와서 온갖 소란들이 가라앉아야 한다.

비가 와야 한다. 그래서 총선으로 여기저기 얼룩진 우리들의 자화상이 씻겨져야 한다. 망가져버린 사회전반을 추스르고 그동안 작파해버린 일상을 되찾아낼 정신의 습기가 있어야 한다.

비가 와서 우리의 공중에 가득히 담겨 있는 온갖 티끌 먼지와 쓰레기들이 빗줄기와 함께 쏟아져 멀리 멀리 떠내려 가야 한다.

그래서 투명한 대기의 새로운 바람 속에서 우리의 미소를 그려내야 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정치꾼들의 그 철가면 같은 얼굴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을 욕하고 그들에게만 모든 과오를 뒤집어 씌울 수 없다.

총선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떳떳할 수 없다.

유권자 혹은 국민의 많은 부분이 부정선거.금권선거, 요지부동의 지역주의 선거에서 초연할 처지가 아니다.

우리는 한표를 고무신 한 켤레로 팔아넘긴 적이 있다. 우리는 1만원 내지 10만원의 현찰로 한표를 팔아넘긴 적이 있는 것이다.

이번 총선은 거울에 비친 오늘의 우리 얼굴이었다. 이제 우리 얼굴은 달라져야 하고 바뀌어야 한다.

바꿔! 바꿔! 라는 노래는 총선 이후에도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먼저 들려야 한다. 우리 모두 국민적 자기정화 없이는 내일이고 희망이고 다 헛된 것이다.

아 꽃 같은 정치, 아름다운 정치는 영영 없는 것인가.

아니, 그런 정치를 위해 우리 민주주의는 더 많은 고행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 총선에도 어김없이 미개의 지역감정이 요동쳤다. 사람이 제가 태어난 고향을 기리는 것은 미덕이다. 그러나 정치에 관련될 때마다 제 고향, 제 고장에만 얽매인다면 그것이 바로 민족을 파괴하는 원인이다. 그것이 사회통합을 가로막는 장벽이고 보편성을 갉아먹는 재앙이고 공동체의 적이다.

이번 총선에서 놀라운 일은 시민운동에 의한 선거혁명에 있다. 그 힘은 크고 자랑스러웠다.

그것은 홍위병론과 상관없이 현대 한국정치 사상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이었다. 이로부터 우리정치는 선거뿐 아니라 입법.행정을 아울러 끊임없이 감시받는 정치, 국민 혹은 시민의 비판적 관리가 지속되는 정치로 나아간다.

비가 와야 한다. 그 광기로 일그러지고 험악해진 적대감정, 그 폭언과 음해.날조.모략들을 빗물에 모조리 떠내려 보내야 한다.

총선 이후가 더 중요하다. 이전은 한때이지만 이후는 길고 길다. 그 이후야말로 비 갠 날의 청정한 세상에 닿아 있어야 한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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