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젠 유권자 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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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야가 지난 2월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의 개정을 통해 후보에 대한 정보공개를 강화키로 합의함에 따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후보의 병역사항, 금고 이상의 전과기록 및 최근 3년간의 납세실적을 공개했다.

전과기록의 경우 4.13 총선 출마자 1천1백78명 가운데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후보는 전국구를 포함한 전체 후보의 16%인 1백89명이다.

후보에 대한 이러한 정보공개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다. 전과 가운데는 시국사범도 있지만 사기.상해.간통 등 도저히 국회의원 후보로서의 자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전과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후보들은 다양한 이유로 변명을 하거나 핑계를 대고 있지만 판단은 유권자의 몫이다. 또한 신상정보의 공개에 대해 악용 가능성을 문제삼기도 하지만 실보다 득이 많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혼탁한 선거분위기 속에서도 이번 선거는 과거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총선연대 등 시민단체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낙천.낙선운동이 전개된 것은 단적인 예다.

이와 함께 후보의 병역 및 납세실적과 전과가 공개된 것은 앞으로 정치지망생들에 대한 자격심사 기능을 분명히 할 것이다. 이제까지 유권자들은 거의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후보들 스스로가 내세우는 이력만을 보고서 투표를 한 것에 비하면 현저한 발전이다.

이번의 전과공개가 유권자들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회의원 입후보자로서 사회생활상의 자격요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투표를 한다면 이것 역시 유권자들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

이번의 전과공개는 최초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법개정을 통해 보완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금고 이상의 형으로 공개기준을 정한 것은 그 가운데 하나다.

벌금형을 규정하고 있는 범죄가 허다한데 금고형 이상으로 제한한 것은 오히려 벌금형을 수시로 받거나 피해자와의 합의를 통해 사건을 해결한 저질 후보를 깨끗한 후보인 것처럼 우대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전과를 공개하는 것은 후보의 과거행적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후보의 전과기록은 과실범죄가 아닌 한 빠짐없이 공개하는 것이 타당하다. 형법 역시 횡령죄와 배임죄.상해죄.협박죄 등 많은 범죄에 대해 벌금형을 규정하고 있다. 금고에 미치지 못하는 형벌이지만 얼마든지 파렴치범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선거법 위반사범의 경우 1백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의원직이 박탈당하도록 규정돼 있는데 과거 그 이하 금액을 선고받고 또다시 입후보한 경우에도 반드시 공개해야 할 것이다.

선거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선거법 위반사범의 경우 철저히 불이익을 받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과공개가 효과가 있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선거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후보가 아니라 유권자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는 선거현실을 보면서 정치에 대한 냉소와 저질정치에 대한 비난으로 위안을 삼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냉소와 비난의 대상은 정치인들이다. 그러나 정작 이러한 비난의 원인제공자인 유권자들 역시 책임의 절반을 피할 수 없다.

21세기 들어 처음 실시되는 16대 국회의원 선거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정치적 행사다.

제도와 의식이 바뀌는 현실 속에서 정치 역시 이번에는 구태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전과공개나 병역사항.납세실적을 공개해도 이를 무시한다면 우리들의 투표행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한국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을 유권자들 스스로 설치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 정치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유권자다.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에 앞서 무능한 저질 정치인을 배출한 해당지역 유권자들 역시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박상기<연세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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