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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걸려 집필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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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국 문학사에 전무후무한 기념비로 우뚝 설 21권짜리 대하소설 『토지』를 남긴 작가 박경리가 생전에 강원도 원주시 원구동 자택에서 글 쓰던 모습.

오늘은 한 해 전 타계한 국민작가 박경리(1926~2008)가 고고지성을 울린 날이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최 참판 가문의 가족사를 씨줄 삼아 700여 명 등장인물의 다채로운 삶의 날줄을 서사한 『토지』. 1969년 9월부터 1994년 8월까지 25년간 총 5부작으로 연재된 이 대하소설은 1970년 이후 우리 문단을 풍미한 민족문학 담론의 금자탑으로 여전히 읽는 이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질곡의 일제 식민치하에서 미래에 올 국민국가 세우기를 포기하지 않은 민족으로 산 이 땅의 사람들의 옹골찬 삶이 책 갈피갈피 묻어 나온다. 프란츠 파농이 말했듯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이들의 민족주의는 상대적 정당성을 갖는다. 일제의 폭압에 맞선 우리의 저항 민족주의는 건강했다. 그러나 깨어 있는 작가정신은 전체의 이름으로 낱낱의 희생을 강요하는 민족에 매몰되지 않았다.

“민족의식이란 가지가지 낯판대기를 지닌 요물이야. 악도 되고 선도 되고 간판도 되고 약자를 희생시키는 찬송가도 되고. 피정복자에게 있어 민족의식이란 항쟁을 촉구하는 것이 될 테지만 정복자에게 있어서의 민족의식이란 정복을 고무하는 것이 되니 말씀이야. 민족의식, 동포애, 애국심, 혹은 충성심,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인간 최고의 도덕이면서 참으로 진실이 아닌 괴물이거든.” “애국심이나 국수주의는 출발에 있어선 아름답고 도덕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추악하고 비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게다. 빼앗긴 자나 잃은 자가 원망하고 증오하는 것은 합당하지만, 또 민족주의를 구심점으로 삼는 것은 비장한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도끼 들고 강탈한 자의 애국심, 민족주의는 일종의 호도합리화에 불과하고 진실과는 관계가 없어. 흔히들 국가와 국가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엔 휴머니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들 하지, 그 말은 국가나 민족을 업고서 저지르는 도둑질이나 살인이 범죄가 아니라는 것과도 통한다.”

작중인물 도솔암 주지와 일본인 오가다의 입을 빌려 민족주의의 역기능을 꼬집은 작가의 일침은 신화화된 단일민족 관념과 아직 충분히 자각되지 못한 다인종·다문화 사회의 현실이 서로 부딪치는 오늘을 사는 우리를 소스라쳐 깨어나게 한다. 국가·민족·인종·성차(젠더) 등 모든 사회·문화적 울타리를 넘어 지향·이해·처지가 다른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한 열린 민족의식과 건강한 시민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책무일 터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