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삼칼럼] 우리가 북한에 빚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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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이 일본과 다시 수교회담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자, 1992년 남쪽과 북쪽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한 목소리로 제기했을 때 일본의 우익인사들이 이렇게 핏대를 올렸던 생각이 난다.

"코리안은 북쪽도, 남쪽도 언제까지 과거를 강매하는 장사를 하려는가. 지난 65년에 맺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지불한 유.무상 달러와 민간차관 등 8억달러로 36년의 식민지지배 문제는 일괄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

아닌 게 아니라 지난 65년에 박정희(朴正熙)정권이 일본과 체결한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에는 일본 우익들이 그렇게 주장할 만한 구절이 들어 있다.

청구권협정이라면 당연히 각종 청구항목이 제시되고 그에 대한 지불방법과 금액이 적시돼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저 달랑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차관 3억달러 등 8억달러라는 전체 자금 규모와 그 지불방법 및 지불기간만 제시해놓고 있을 뿐이어서 당시 '모개흥정' 이란 비판을 받았던 청구권협정은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강변할 만도 하게 두 나라 및 그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이랬으니 종군위안부 문제이건, 사할린동포 문제이건, 유출문화재 문제이건, 원폭피해자 문제이건 간에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설사 너희들 말이 백번 옳다하더라도 이미 8억달러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 이 아니냐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주장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여러가지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강변의 꼬투리를 준 것만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일본 우익들에게 분노하기에 앞서 당시의 정권과 협상자들에 대해 먼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청구권에 관한 것만 '모개흥정' 인 것이 아니었다. 대한제국과 일본간에 맺어진 한일합방조약 등 옛 조약들이 유효인가 무효인가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두 나라가 자기 편리할 대로 해석이 가능하게 하는 이중적 표현을 의도적으로 허용했다.

이래서 한일조약이 체결된 지난 65년이 공교롭게도 바로 을사(乙巳)년이기도 해 한일조약을 당시의 비판자들은 제2의 을사조약이라고 불렀다.

이런 한.일간의 조약 및 협정 내용은 다시 시작된 북한과 일본간의 수교협상에서 북한측에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과거사에 남북의 구별이 있을 수 없는 이상 우리로서는 북한이라도 일본과의 협상에서 당당하고 의연히 임했으면 하는 심정이다.

그러나 한국측의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본으로서는 좀처럼 한국측과 맺었던 조약이나 협정내용 이상의 것을 북한측에 보장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설사 지불하는 액수가 더 커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측과 맺은 협정의 내용을 스스로 뒤엎는 협정이나 조약을 맺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북한이 대의명분을 지키기 위해 실리를 포기하며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북한의 현재 형편은 35년 전 남한의 그것보다 그리 나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한에 이어 북한도 눈앞의 실리에 급급해 대의와 명분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지난 61년 5.16으로 군사정권이 한국에 들어서자 일본의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한국에 군사정권이 들어 섰기에 모든 것은 박정희 등 소수지도자의 마음대로 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액수로 朴을 만족시키기만 하면 국회도 없고 해서 장애가 없다" 며 기뻐했다고 전한다. 또 당시 자민당 지도자였던 고노 이치로(河野一郞)도 "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해 있어 매우 절박하게 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유리한 흥정을 할 시기" 라며 적극적인 협상을 독려했다고 한다.

나쁜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북한마저 그 절박한 경제형편 때문에 눈앞의 실리에 굴복한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인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해결은 영원히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일 수교회담은 결코 북한만의 문제이지 않다. 지난 3월 19일 KBS-TV는 서지학자 이종학씨가 북.일 수교협상에 나선 북한이 올바르게 과거사를 청산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한일합병과 관련한 1차 사료를 조총련측 인사에게 건네주는 내용을 방영했다.

북한에 빚진 정부도 그같은 입장이어야 한다. 단지 이론적.정신적 협조와 지원만이 아니라 북한이 경제형편 때문에 대의명분을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경제적 지원도 경우에 따라선 필요할 것이다.

남북분단 이전의 한.일 과거사 청산문제에는 남과 북도, 보수와 진보의 구별도 없으며 오직 역사적 대의와 민족공통의 자존심이 걸려 있을 뿐이다.

유승삼<중앙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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