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작품을 말한다]'전후 추상미술' 전 기획한 우혜수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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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작가는 작품을 만든다. 전시는 그 작품으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편의 연극을 만들려면 연출자가 필요하듯 전시는 큐레이터가 그런 역할을 한다.

전시장은 무대이고 작품은 배우이며 큐레이터는 연출자다. 각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한 공간에서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있어야 하며 이야기를 구성하려면 시대적 흐름과 요구를 짚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호암갤러리에서는 2000년을 여는 첫 전시로 5월 14일까지 '한국과 서구의 전후추상미술 : 격정과 표현' 전이 열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한국전쟁 이후 시작된 우리나라의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미술 전반을 살펴보는 자리다.

새 천년을 목전에 둔 시점에 왜 전후 추상미술을 이야기하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 성싶다.

20세기 한국 서양화단을 돌이켜보자. 한국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는 격렬한 추상미술의 시기로 본격적인 현대미술의 출발점이다.

21세기의 우리 미술을 전망하기 위해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나아가 우리 현대미술을 당시 세계 미술사의 주요 흐름과 대비시켜 보는 것은 좀더 폭넓고 객관적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앵포르멜 미술은 유럽의 앵포르멜에서 명칭을 따온 것이다. 거친 마티에르(질감)를 통한 전후 유럽의 정신적.물질적 황폐함, 전통적 질서에 대한 저항의식 등에 우리 화가들은 깊이 공감했다.

유럽과 동시에 미국에서도 47년 잭슨 폴록의 드리핑(뿌리기)회화의 완성을 기점으로 추상표현주의가 급부상한다.

이 사조는 전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한 미국의 힘을 바탕으로 50년대 세계 미술을 주도하는 흐름이 된다.

박서보.윤명로.김종학이 주축이 된 우리나라의 앵포르멜은 서구와 약 10년의 차이를 두지만 '전후' 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빌헬름 보링거가 추상 충동을 인간의 불안 심리에서 찾았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듯 싶다.

그러나 이 시기의 미술에 대해서는 외국의 미술사조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과 서구미술의 추종적 모방이라는 비판적 입장이 공존한다.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전에 문화사대주의에 대한 뿌리깊은 컴플렉스 때문에 우리가 지나친 자생론.모방론 논쟁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일반적으로 추상미술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도대체 뭘 그렸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미술을 음악과 비교해보자. 많은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음악을 좋아한다. 모차르트가 곡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알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듣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뭔가' 가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음(音)' 이라는 요소를 바탕으로 시간을 매개로 전달되는 추상적인 예술이다. 음악을 들을 때 이 곡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가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음악을 듣는 것처럼 볼 수는 없을까.

추상화와 구상화는 서로 매우 다르며 정물화나 풍경화는 구체적이기 때문에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음악이 음으로 이뤄지듯 정물화나 풍경화 역시 점.선.면으로 이뤄진 형태와 색깔로 뒤덮인 평면일 뿐 거기에는 한 송이의 꽃도, 한 뼘의 파란 하늘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추상화와 구상화의 구분은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면서 점.선.면.색채, 그리고 캔버스라는 기본적 요소로 이뤄진 회화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 추상회화다.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작가 내면의 격정과 감성을 미술의 기본 요소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보는 이의 감성에 호소한다고 보면 좀더 이해가 쉽다.

전쟁 후의 참혹한 현실.불안함, 실존에 대한 물음, 현실과 전통적 권위에 대한 저항의식 등이 배경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4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쉴 고르키의 작품을 보자. 밀폐된 공간 안에 보이는 대립적이고도 불안한 선묘, 군데군데 자리잡은 어두운 색채가 눈에 띈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 겪은 사건은 실로 참혹했다. 부인과 이별했으며 화재로 아끼던 작품을 몽땅 잃었다. 또 암에 걸리기까지 했다.

출품작 중 가장 크기가 큰 클리포드 스틸의 작품을 보자. 높이 8m.가로 5m에 달하는 이 대작은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절대적 가치를 두는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작으로 추상회화지만 자연이 주는 장엄함과 숭고함을 경험하게 한다.

전시를 다 본 어린이 관람객은 '신나는 추상화 그리기' 코너를 방문할 것을 권한다. 잭슨 폴록의 드리핑 기법을 직접 체험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인간의 창의적 감성을 자극하는 미술 조기교육.평생교육은 미술관을 통해 이뤄져야 하며 이런 경험은 오래도록 남아 한 사람의 장래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작가나 미술사에 남을 대가들의 작품을 직접 보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우혜수 <삼성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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