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영화된 금융기관 '피로 증후군' 나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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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올들어 은행.보험.투신사 등 국영화된 금융기관에서 '피로 증후군' 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인사 시즌을 맞아 정부 눈치보기가 심해지고 있으며, 걸핏하면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등 경영에 긴장도가 풀어진 금융기관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가 대주주인 은행.보험.투신사 등의 조기 민영화 방안.일정을 체계적으로 세워 실행해 나가는 등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21일 금융계에 따르면 서울은행은 이미 투입된 4조5천억원 외에 1조8천억원의 추가자금 지원을 정부에 건의했다.

지난해 2조5백억원의 자금을 지원받은 대한생명도 최근 1조5천억원 가량의 추가 자금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적자금이 바닥나 현재로선 더 줄 돈이 없는 정부는 먼저 자구노력을 극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가 "아직까지 서울은행.대한생명이 정부 추가지원을 공식 요청한 바 없다" 고 밝힌 것은 이런 입장 때문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달초 조흥.한빛.외환은행 등 공적자금 투입은행들은 사외이사 전원에게 일괄사표를 제출받았다.

이들은 "일부 사외이사가 문제가 있으니 물갈이를 하겠다" 는 금융당국의 방침에 따라 임기가 남은 사외이사들까지 일괄사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은행 인사권을 사실상 당국에 넘겨준 것으로, 공적자금 투입후 1998년말 체결한 경영정상화 약정서에서 경영이 부진할 경우에만 책임을 묻되 평소 인사 등 경영 전반에는 간여하지 않겠다던 규정을 정부나 은행이 모두 지키지 않은 것이다.

외국인 대주주가 들어선 제일은행이 사외이사 임기를 1년으로 단축하라는 정부 방침에도 불구하고 정관에 3년으로 임기를 못박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일섭 한국회계연구원장은 "국영화 후에는 정부 눈치보기.기대기 등 부작용과 피로현상이 나타나게 마련" 이라며 "이를 막고 경영정상화를 조기에 이루려면 정부가 경영은 경영진에 일임하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민영화를 앞당겨 책임경영 체제를 갖춰줘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와 관련,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정부로서도 자구노력만 강조할 게 아니라 독자경영이 가능할 만한 자금지원 등을 고려해야 한다" 며 "이를 통해 해외매각 등 주인 찾아주기 일정을 확정.공개하는 절차를 체계적으로 밟아가야 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이정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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