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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국민이 눈치 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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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노무현 정권은 장삿속이 밝다. 국제정치에선 우물 안 외톨이가 돼가지만 국내정치에선 약고 악착스럽다. 우리 정치판에선 민심을 뒤흔들어 놓는 간단한 방식이 있다. 국민을 편 갈라놓고 일을 벌이면 된다. 한국 현대사의 기구한 곡절만큼이나 증오와 갈등의 편 가르기 소재는 널려있다. 친일, 좌우 대립, 민주화 투쟁, 국가보안법은 휘발성이 단연 높다. 거기에다 불을 지르면 국민끼리 금방 눈을 흘기고 삿대질을 해댄다. 한쪽에선 비판의 목소리를 키우고 다른 쪽에선 정권에 충성을 다짐한다.

노 정권이 친일.과거사를 파헤치고 보안법을 폐기한다고 공언한 뒤 여론 흐름은 어김없다. 민심은 긴장하면서 쪼개졌다. 친노.반노 간 험악한 대립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친노 세력 중 좌파 성향 지지자들의 결속력은 상대적으로 단단하다. 열린우리당은 자기 편이 뭉치는 기미가 나타나자 반대편을 향해 반민주.반통일세력이라고 매도한다. 편 가름을 통해 먼저 자기편을 확실히 묶어 정치적 실리를 챙긴다. 다음에 반대편을 줄기차게 공략해 이윤을 늘려가는 수법이다. 그것이 노 정권 핵심이 즐겨 쓰는 분열 정치의 장삿속이다.

그게 제대로 먹히려면 정의감, 시대적 소명, 양심, 개혁 같은 이미지가 붙여져야 한다. 편 가르기 정국에선 그런 평판을 얻으면 이윤은 극대화된다. 지난번 탄핵 정국 때 노 정권은 서툴지만 양심 있는 약자로 자신을 묘사해 성공했다. 한나라당은 썩고 부패한 강자로 비춰져 죽을 쒔다. 과거사.보안법 정국에서 노 정권이 정의의 사도로 이미지 포장을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어떤 정권이든 분열의 정치 방식을 써먹고 싶어한다. 정권 지지도가 30% 아래로 떨어지면 인기 만회용 카드로 등장한다. 여론이 쪼개지면 지지층은 주먹을 불끈 쥐고 결집하니 외견상 국정의 추진력이 높아지는 듯하다.

과거 김영삼.김대중 정권도 그런 유혹을 받았으나 상당부분 자제했다. 국민이 골병들기 때문이다. 거듭된 불화와 반목은 국정 관리에도 치명상을 준다. 양김 정권만 해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 내 편, 네 편을 골라 가르지 않았다. YS, DJ 는 반대 세력으로부터도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애를 썼다. 여론을 의식했다. 반쪽의 성원만 받는 대통령이 아닌 국민 전체, 통합의 대통령이 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나 현 정권은 다르다. '별놈의 보수'라고 지목한 사람들이 비판하건 충고를 하건 상관없다는 식이다. 원로 1500명의 전례 드문 시국선언을 시대착오라고 가볍게 깔아 뭉갠다.

그러나 편 가르기 정치 수법은 약발이 크게 떨어졌다. 다수 국민이 그 수법을 눈치 챘다. 툭하면 국민을 나누고 자기 쪽만이 정의감 있는 양 나오는데 여론은 지겨워한다. 어느 때는 헌법을 존중한다고 해놓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맘에 들지 않으면 수구.반개혁이라고 비난하는 열린우리당의 행태에 기가 막혀 한다. 현 정권이 출범할 당시 다수 국민은 민주화와 산업화 세력의 통합을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의 시대를 꿈꾸었다. 이젠 그 꿈을 버려야할 처지다. 내 편, 네 편 나눠 상대방 조상들의 약점을 캐는 데 나서야할 판이다.

현 정권은 국회 다수 의석에다, TV가 눈을 딱 감고 밀어주는 강한 권력이다. 그런데도 약자나 역사의 피해자처럼 행세하는 것은 비겁하다. 보안법 문제와 과거사 파헤치기에 대한 여론은 시큰둥하다. 서민들이 살기 힘들 정도로 민생 경제가 어려운 탓도 크다. 그에 못지않게 큰 이유는 편 가르기 국정 운영방식에 민심이 지쳐있기 때문이다.

박보균 정치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