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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친과 나란히 100m 신기록 꿈, 커플링은 그때 맞춰야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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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가을 햇살 속에서 환하게 미소짓는 김하나 선수. 그에게서 강인한 운동선수의 이미지는 떠올리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200m 한국기록 보유자고, 100m 신기록 경신을 눈앞에 두고 있다.


김하나(24·안동시청)에게 휴대전화를 걸면 아이돌 그룹 빅뱅의 ‘아무렇지 않은 척’이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러나 김하나는 이제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해도 주위의 시선과 기대를 피할 수 없다. 그는 지난 10월 대전에서 열린 전국체전 여자육상 4관왕이자 최우수선수(MVP)로서, 한국 여자육상의 기대주이기 때문이다.
김하나는 전국체전 200m에서 23초69를 기록,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박미선이 세운 한국기록(23초80)을 23년 만에 0.11초 단축했다. 100m는 11초59에 끊었다. 15년 전인 94년 이영숙이 기록한 한국기록(11초49)에 0.1초 차로 다가서는 좋은 기록이었다. 400m 계주에서는 경북 대표로 출전해 45초33으로 우승, 한국기록(종전 45초59)을 새로 작성했고 1600m 계주에서도 우승했다.

육상계가 떠들썩했다. 전국체전 기간 내내 미디어는 김하나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물론 그 뒤 프로야구나 프로농구 같은 종목들이 다시 스포츠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김하나는 차분한 생활 속으로 돌아갔다. 그를 만난 것은 가로수가 마지막 잎을 지우던 19일, 서울 효창공원에서였다.
 
전국체전서 200m,1600m계주 신기록
사복 차림의 김하나는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지만 의사 표현은 분명했다. ‘혜성’이나 ‘신데렐라’라는 표현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자꾸 ‘혜성’ ‘신데렐라’라고 불리니까 그동안 내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것 같아 속상했어요”라고 말했다.

김하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멀리뛰기 선수였다. 2005년 아킬레스건을 다친 뒤 단거리로 종목을 바꿨다. 2007년 안동시청에 입단해 오성택(50)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기록이 좋아졌다. 오 감독은 “(김)하나의 최대 장점은 어떤 훈련도 다 소화해내는 성실함”이라고 말했다. 1m70㎝·56㎏의 체격에 파워와 유연성이 뛰어난 김하나는 멀리뛰기를 하면서 익힌 리듬감과 근력 덕분에 곡선 주로에서 원심력을 이겨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기록은 빠르게 향상됐고, 지난해 8월 강원도 태백에서 열린 제20회 전국실업단대항 육상경기 대회 때 희망의 빛이 보였다. 200m에 출전해 맞바람에도 불구하고 23초대 기록(23초94)을 냈다. 김하나는 “올해 들어 200m뿐 아니라 100m 기록도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0.01초씩 기록을 단축시키는 쾌감 때문에 자신감을 많이 얻었죠”라고 말했다.

요즘 김하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녀는 “한 번은 스포츠 매장에 갔는데 중·고등 학생이 알아보더라고요. 저를 ‘트랙 위의 김태희’라고 표현한 기사에 악성 댓글이 엄청 많이 달렸어요”라면서 웃었다.
 
엄마에게 이어받은 ‘질주 본능’


‘하나’라는 이름은 어머니 이미자(51)씨가 지었다. 어머니도 고등학교 때까지 단거리와 도약 종목을 뛴 육상 선수였다. 어머니가 못다 이룬 꿈이 유전으로 이어졌는지 김하나도 무언가에 끌리듯 육상을 시작했다.

내성적이고 조용한 데다 운동이라고는 거의 해보지 못한 꼬마 소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출전한 교내 체육대회 멀리뛰기에서 1등을 했다. 학교에 육상부가 없어 제대로 훈련을 받지도 못했지만 파주시 대회와 경기도 대회까지 석권했다.

문산여중 1학년 때 정식으로 육상을 시작한 김하나는 고된 훈련과 외로운 숙소 생활에도 불평을 한 일이 없다. 어머니는 묵묵히 딸을 지켜줬다. 김하나는 “엄마는 믿고 맡기는 편이에요. 너그럽게 날 지켜봐 주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네요”라고 말했다.

김하나는 요즘 자신에게 쏟아지는 기대가 부담스럽다. 육상계에서는 김하나가 한국 육상을 살려내기라도 할 것처럼 기대를 건다. 더구나 인터뷰 때 ‘아시안게임 때 새 기록 쓰겠다’ ‘세계선수권 결선에 오르겠다’ 등 자신도 모르게 속에 없는 얘기를 쏟아낸 뒤 마음이 심란했다. 그는 “솔직히 내 목표는 소박해요. 기록을 조금씩 조금씩 깨나가고 싶을 뿐이거든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국체전이 끝나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뜨겁던 관심도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는 “홀가분하면서도 약간 서운하기도 해요. 비인기종목 선수의 설움이겠죠”라면서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그에게 베이징 올림픽 역도 금메달리스트 장미란(26·고양시청)은 롤모델이다.

김하나는 “육상은 아직 세계 벽을 넘기 힘들잖아요. 세계 대회 때마다 메달을 따는 다른 종목 선수들을 볼 때마다 부러워요”라며 “비인기종목인 역도를 되살린 장미란 선수에게 애정이 가고 응원을 하게 돼요”라고 말했다. ‘메달을 따면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하며 ‘나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김하나의 내년 목표는 100m 한국신기록을 깨는 일이다. 기록 단축을 위해서는 출발 반응 속도를 높여야 한다. 그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출발이 0.08초 이상 늦다. 최근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제18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100m 예선 때는 출발 속도에 신경 쓰다 부정 출발로 실격당했다.

그는 이번 겨울 훈련에서 상체 근력을 키우는 데 집중할 계획이다. 상체 근력을 키워야 출발 때 엉덩이를 낮춰도 버틸 힘이 생긴다. 그는 “반응 속도는 타고나야 하는데 나는 반응 속도가 가장 늦은 편이에요. 이를 극복하려면 반복 훈련과 끊임없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남친표 생과일 주스에 감동도
김하나도 가끔씩 흔들릴 때가 있다. 그는 “한 번 몰입하면 포기하지 않고 집중하지만 가끔은 아무것도 하기 싫을 만큼 슬럼프를 겪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석양 무렵 남산에 오른다. 정상에 서서 서울 야경을 바라보면 속이 뻥 뚫리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에게는 남산에 같이 오를 든든한 친구가 있다. 남자 단거리 국내 1인자 임희남(25·광주시청)이다. 2005년 국가대표팀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서로 호감을 느끼다 지난해 여름 임희남이 프러포즈를 한 뒤 교제를 시작했다. 묘하게도 임희남과 만난 뒤 김하나의 기록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김하나는 “많이 이해해줘요. 심리적으로 안정되니까 기록도 좋아지는 것 같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지난해 전국체전에서 부진한 김하나는 임희남과 함께 남산에 올랐다. 그때 “내년 전국체전 때는 최고의 기록을 써볼 거야”라고 다짐했다. 김하나는 그때의 약속을 올해 대전에서 지켰다.

두 사람은 제대로 데이트할 시간도 없다. 훈련과 대회 일정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카페나 음식점에서 가끔 만날 뿐 함께 영화 구경도 못했다. 그러나 ‘총알 탄 커플’은 서로를 지켜주는 버팀목이다. 김하나는 “한 번은 대회를 앞두고 남자 친구가 생과일을 직접 주문해서 주스를 만들어 줬어요. 그때 ‘남자 친구 참 잘 만났구나’라고 생각했죠”라고 자랑했다.

김하나와 임희남은 내년 같은 대회에서 나란히 100m 한국신기록을 깨보자고 약속했다. 이들은 아직 커플링을 맞추지 않았다. 한국 육상의 숙원인 100m 한국신기록을 깬 뒤 커플링 반지를 맞추자는 이들의 약속이 예쁘다.

최원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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