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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지붕위에서의 외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1909년 10월 26일, 대륙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의 하얼빈에서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르프체프와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장교단을 사열하고 있을 무렵 환영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뛰쳐 나오며 세발의 권총을 발사했다. 이토가 명중된 것을 확인한 이 청년은 그 즉시 만세삼창을 외쳤다.

이 청년의 이름은 안중근(安重根).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의 열혈청년이었다.

그는 뤼순(旅順)의 감옥에서 죽기 전까지 자서전을 썼는데 그 자서전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천주교인이 됐는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형제들이여, 나에게 할 말이 있으니 내 말좀 들어보소. 천주는 누구신가. 비롯이 없고 끝이 없고 삼위일체로 전능하시며 일월성신을 만드시고, 착하거나 악한 것을 상 주시거나 벌 주실 수 있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닌 대주재자(大主宰者)가 바로 천주인 것이오. "

이렇듯 안중근은 16세 때 프랑스인 홍석구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자신의 세례명을 토마, 즉 다묵(多默)이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투사 이전에 뛰어난 신앙인이었던 토마, 안중근에 대해, 당시 천주교회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했으며, 안중근을 살인자로 규정함으로써 폭력적인 일본의 강제합병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또한 초기 천주교회에서 외국인 신부들은 한국사회에 뿌리내린 유교전통을 무시했으며 따라서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미신행위로 규정함으로써 천주교 박해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오에 대해 1993년 8월 21일, 명동성당에서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애국심' 이란 주제로 강론 하던 중 지난 시절 안중근을 살인자로 규정했던 가톨릭 교회에 대해 반성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신앙과 조국애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국가보위를 위해 헌신할 것을 권장하고 있고, 국가방위를 위한 전투 중에 발생한 살상행위에 대해서는 단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분의 신앙과 삶을 추모하는 미사를 올리는 것은 그 분의 삶은 숭고하였으며, 그 분의 신앙이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

지난 12일, 교황 바오로 2세는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저지른 죄를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미사를 집전했다.

가톨릭이 교회 역사상 세번째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 대희년' 을 맞아 '용서의 날' 로 정한 이 날, 사순절을 맞아 교황은 보라색 제의를 입고 '교회의 일곱가지 죄' 를 고백했다.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는 예수상의 두 다리에 입을 맞춘 후 시작된 이 참회에서 교황은 1095년 교황 우로바노 2세에 의해 시작된 십자군의 만행, 8회에 걸친 십자군 원정을 통해 이슬람 교도와 유대인들에게 저질러졌던 수백만명의 대량학살을 비롯해 중세말기 이후로 교황의 승인아래 이단자들을 마녀로 몰아 태워 죽인 '마녀사냥' 에 의한 10만명이 넘는 끔찍한 고문과 화형, 그리고 2차세계대전 중 독일 나치가 저지른 6백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 에 대한 반성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해묵은 반(反)유대인 감정이 나치의 학살정책에 근거를 마련해 주었을지도 모르는 과오를 저질렀던 것이었다.

교황은 한때 기독교인들이 무자비한 수단과 폭력으로 교회의 정신을 더럽혔음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잘못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교회의 회개를 받아들여 자비를 베풀어달라' 고 신께 기도한 것이다.

예수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고 말함으로써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지난 일을 반성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일이야말로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그 첫번째 관문임을 예수는 분명히 못박고 있는 것이다.

1천년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과오에 대한 교황의 참회나 안중근 의사에게 저질렀던 가톨릭 교회의 반성은 바로 기독교 정신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말했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내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고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

그렇다. 교황의 참회는 역사의 지붕위에 올라가 전 인류에게 외치는 천주교회의 고백성사다. 인간에 있어 최고의 지혜는 자기 죄를 발견해 내는 분별력에 있으며, 인간에 있어 최고의 미덕은 그 죄를 뉘우치는 데 있으며, 인간에 있어 최고의 용기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 에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라스코니코프를 향해 창녀 소냐는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다.

"일어나라, 일어나서 네가 더럽힌 땅에 엎드려 입 맞추고 사람들을 향해 절을 하면서 '나는 살인죄를 범했다' 고 소리치며 고백해. 그러면 하느님이 너를 다시 살려주실거야. "

최인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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