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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기획] 흔들리는 선거공권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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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선거 공권력에 대한 도전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선거관리위의 권위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거현장에서는 선거사범에 대한 강력 단속의지를 밝힌 검.경의 공권력도 제대로 먹혀들지 않고 있다.

그틈을 비집고 불.탈법이 거침없이 자행된다. 과거 선관위와 시민단체가 함께 벌이던 '공명선거운동' 의 자리가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에 따른 선거법 불복종운동으로 메워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경쟁이 치열한 수도권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가고 있다.

◇ 실태〓총선연대와 서울시 선관위가 공천철회 서명운동을 놓고 맞붙은 지난달 25, 26일. 서울지역 25개 선관위는 걸려오는 전화 받기에도 허덕였다.

총선연대와의 한판 승부에 각 지역 선관위에 2명씩뿐인 지도직원들이 모두 차출됐기 때문이다 일부 제보성 전화가 걸려왔지만 5명 남짓한 나머지 직원들로는 현장확인을 다 나갈 수도 없었다.

서울마포 선관위 관계자는 "베테랑 직원을 시민단체 집회에 빼앗기다 보니 부정선거 감시업무는 사실상 마비상태" 라고 말했다. 종로로 차출됐던 단속요원들은 시민단체와 멱살잡이를 하느라 진이 빠져 돌아왔다.

현장을 용케 잡아도 곤욕을 치르긴 마찬가지. 대놓고 달려드는 후보쪽의 반발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 방침이 전해지기 시작한 지난해 말. 시흥시 선관위 관리계장 고광모씨와 서무계장 김계호씨는 "출마 예정자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는 신고를 받고 시흥시 대야동 YWCA 버들캠프로 긴급 출동했다.

현장은 한나라당 시흥시 지구당의 '당직자 송년의 밤' 행사. 그러나 高계장 일행은 입구에서부터 막혔다.

지구당 간부와 청년 20여명이 高계장의 비디오카메라를 빼앗으려 달려들었고 옥신각신 끝에 비디오카메라는 파손됐다. 간신히 담았던 증거까지 없어져버린 것. 현장 메모수첩도 찢겨나갔다. 지구당 간부 李모씨는 "×새끼들 잠이나 자지 뭐하러 나왔냐" 며 욕설을 퍼부었다.

시흥선관위의 수난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그날 공무를 방해했던 사람들을 고발한 이후 선관위 직원들 집엔 밤늦은 협박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결국 집전화번호까지 바꿨다.

서울 서초구 선관위는 민주당 공천자 안동수씨와의 '현수막 숨바꼭질' 로 한동안 허송세월을 했다.

安씨의 이름이 들어간 무료법률상담 대형 현수막 10여개가 문제의 발단. 安씨는 선관위의 자진철거 요구에 불응했고, 선관위가 강제 철거하자 선관위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름만 가린 채 같은 현수막을 같은 자리에 내걸었다.

경기 분당 선관위는 자칭 시민단체인 청년단체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이 단체가 지난달 중순 자민련 오세응 의원(당시 한나라당)의 공천반대 유인물을 관내 버스정류장 20여곳에 게시한 것을 확인하고 조사에 나섰지만 단체 관계자들이 '마음대로 하라' 며 끝내 조사에 응하지 않은 것.

조사불응은 선관위만 겪는 고초가 아니다. 경찰도 맥을 못추기는 마찬가지. 인천의 한나라당 한 후보는 지난달 14일 의정보고회를 갖는다는 명목아래 노인정 3곳을 잇따라 돌며 귤 한상자씩을 돌렸다.

경찰은 이같은 행위가 기부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 한나라당 관계자들에게 수차례 출석요구서를 발송했지만 불응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원칙적인 법집행을 할라치면 '야당탄압' 이라며 역공을 취할 게 뻔해 체포영장 발부는 꿈도 꾸지 않고 있다" 며 난감해 했다.

그러다보니 일선 선관위 직원들의 사기도 위축됐다. 서울 마포 선관위 직원들에겐 한달전 대흥동 명함단속건이 악몽이다. 불법 명함배포 현장을 잡으려니 후보 조직원들이 몰려들어 "시민단체들이 불법하는 것은 가만 놔두면서 고작 명함돌리는 게 뭐가 큰 위반이라고 막냐" 며 대들었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예전엔 선관위 완장만 봐도 피하곤 했는데…" 라며 말문을 닫았다.

◇ 원인과 대책〓결국 선거법과 선관위 경시 풍조 때문이다. 지난 1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시민단체 옹호발언도 한몫 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들은 " '그러면 후보단속을 어떻게 하냐' 는 지방선관위의 항의가 빗발쳤다" 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구악(舊惡)정치인과 선거 운동원들은 이런 풍조를 틈타 공공연히 불법을 저지른다.

선관위는 나름대로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밀리면 선거관리는 끝장" 이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경찰과의 연계망을 확실하게 가동하는 한편 임의동행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그냥 넘기기 십상인 경미한 선거사범이라도 악의적이면 과태료를 부과할 방침이다.

중앙선관위 임좌순(任左淳)사무차장은 "'선거사범 단속이 예전보다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지만'재판부에 직접 재판을 요구하는 재정신청제도 등을 통해서라도 선거사범들을 끝까지 응징하겠다" 고 말했다.

기획취재팀〓김기봉.이상렬.서승욱.조민근 기자kib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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