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영어 공용어화 문제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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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모든 분야에서 영어의 필요성이 날로 증대하고 그에 따라 영어교육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최근에는 아예 영어를 우리나라 제2의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그러나 영어가 우리의 공용어가 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파국으로 몰아갈지도 모를 위험한 발상이다. 특히 이 문제는 영어교육의 문제와는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영어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겠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만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우선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를 제1공용어로 하고 영어를 제2공용어로 채택하려면 국민에게 한국어와 영어 중 하나를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 주고,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도 국민생활을 불편없이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자면 정부는 대충 다음과 같은 엄청난 변혁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각급 학교에서 쓰는 교육언어가 한국어.영어가 돼 모든 교과서를 한국어판과 영어판 두가지로 만들어야 하고, 교사는 한국어나 영어로 또는 둘 다로 가르쳐야 한다.

관공서의 모든 문서는 한국어.영어로 작성돼야 하며 모든 회의와 보고, 모든 민원업무 역시 한국어와 영어로 할 수 있도록 한다. 법원에서 재판은 한국어.영어로 동시에 진행해야 하고 모든 법과 규정이 한국어.영어로 돼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 의원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것도 한국어나 영어로 또는 둘 다로 해야 한다. 라디오.텔레비전 방송도 두 언어로 해서 국민이 공평하게 선택해 듣고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연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아마 우리 국민은 아무도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 지역에 복수의 언어가 공존할 때 두가지 바람직하지 못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첫째, 언어의 세계는 동.식물의 생태계와 비슷해 힘센 쪽이 약한 쪽을 지배하게 된다. 마치 한동안 말썽이 되었던 황소개구리가 토종개구리를 잡아먹는 것과 같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힘이 약한 언어는 멸종 위기에 몰리게 된다. 실제로 미국 대륙의 아메리칸 인디언 언어들이 그렇게 해서 지상에서 사라졌고 또한 계속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말의 역사는 유구하다. 단군이래 5천년의 역사가 전부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랜 10만년, 20만년 전 아득한 옛날로 올라간다. 사대주의나 국수주의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정신적 토대가 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 나라말이 소멸의 위기로 내몰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 스스로 외국어를 공용어로 끌어들이는 횡포를 저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둘째, 두 언어가 공존할 때 이를 사용하는 계층이 둘로 나누어짐으로써 민족의 화합을 해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만의 하나라도 중상류의 기득권층은 영어를, 그 이하의 계층은 한국어를 선호하고 그로 인해 기득권층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점점 더 유리해지는 반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더욱 불리해진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는 인도.필리핀.나이지리아 등 제3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인도는 영어가 공용어라고 하지만 사실상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은 소수의 기득권층이고 절대 다수 빈곤층은 자기 모국어밖에 모르는 실정이다.

필리핀에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는, 교육받은 사람들은 미국.호주.중동 등 외국 이민으로 빠져나가는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

한 민족이 외세의 침략을 받고 강압에 못이겨 외세의 언어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경우는 있지만 스스로 외국어를 자기 국어로 끌어들이는 일은 역사상 유례가 없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고 결코 해선 안될 일이 있다. 외국어로서의 영어 교육과 공용어 문제를 혼동한 나머지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우리말을 영원히 잃어 버리게 할지도 모르고 민족화합을 깰지도 모를 외국어의 공용어화 같은 일은 결코 계획해서는 안될 일이다.

박병주<경희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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