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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백남준 기념관 짓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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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백남준 기념관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쓰려 합니다. 적어도 월드컵이 열리는 2002년 안으로 말입니다.

미술인이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보다 저 같은 가수이면서 미술 애호가가 쓰면 오히려 시선을 더 끌 수 있을 듯싶어 이렇게 용기를 냈습니다.

미국 뉴욕 하면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 하면 금방 에펠탑, 느트르담 성당, 그리고 그 째째한 센 강변이 떠오릅니다.

터놓고 얘기합시다. 외국 사람들한테 서울 코리아 하면 뭐를 떠올리겠습니까. 63빌딩을 떠올리겠습니까. 아니면 남산의 케이블카이겠습니까. 신통한 게 없습니다. 서울을 한번 다녀간 외국인들한테서 단연 교통지옥이 떠오를 것입니다. 이 건 참 한심한 일입니다.

사정이 어떻든 2002년이 되면 축구 때문에 외국인들이 꾸역꾸역 몰려 올 것입니다. 축구가 아니더라도 겸사겸사 일본을 간 김에 한국까지 둘러보는 경우도 많은 것입니다.

일본은 세상이 다 아는 동양 최대의 부자 나라입니다. 널리 알려진 구경거리도 많습니다. 후지산도 있고 가부키도 있고 세계 고급음식문화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스시, 생선초밥도 있습니다.

제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뉴욕엘 가면 한입거리 엄지 손가락만한 생선초밥 한 알에 우리 돈으로 3천~4천원 짜리가 허다합니다.

우리한테는 뭐가 있습니까. 뭐가 외국인의 구미를 당기겠습니까. 혹 6.25 한국전쟁 참전용사 가족이나 홀트복지회를 통한 양자양녀 가족쯤 된다면야 당연히 한국이 가봐야 할 나라로 꼽히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외국인들을 끌어 모을만한 요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거 저런 거 말고 그냥 축구 때문에 외국 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칩시다.

당신 같으면 축구장 빼고 그 분들을 어디로 안내하겠습니까. 서울 청담동에 사는 제가 외국 사람들을 안내해야 할 경우 얼핏 두군데가 떠오릅니다. 낮엔 인사동 거리, 그리고 밤엔 남대문과 동대문의 야시장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풍속 따위를 구경시켜 드리는 것이지 문화를 구경시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깨에 힘을 주고 으스대며 구경시켜 줄 게 못된다는 얘깁니다.

만일 말입니다. 이런 때 김포(그때는 인천국제공항이 되겠군요)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중간쯤 어디, 혹은 미사리나 양평쪽도 좋습니다.

어느 양지바른 곳에 백남준 기념관 같은 게 하나 있다면 얼마나 개운하겠습니까. 얼마나 품위가 서겠습니까. 이태원이나 야시장을 안내해봐야 무슨 품위가 서겠으며 중국의 자금성이나 대만의 박물관이 온세상에 훤이 알려져 있는데, 비원이나 인사동을 안내해봐야 무슨 자랑이 되겠습니까.

백남준(白南準) 기념관은 틀립니다. 코리안 아티스트 남준 팩이라는 이름 석자만 들어도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은 겸허해집니다. 우리의 어깨도 덩달아 으쓱해집니다.

이제 백남준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대미술에 관한한 추종을 불허하는 달팽이 모양의 미술관이 있습니다. 그게 구겐하임이라는 미술관인데 지금 당장 거길 가면 거대한 규모의 백남준 예술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백남준뿐이냐고 저한테 묻는다면 저의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다른 것 다 그만 두고 대한민국 건국 이래 좋은 의미로 세계에 알려진 이름으로 백남준만한 게 없다는 것입니다. 좀 찜찜한 의미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긴 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야말로 역사와 전통과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도 우리의 백씨만한 순수 미술가를 배출한 적이 없고 더구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아시아 대륙에서 백남준만한 위대한 미술가가 쉬이 나오질 않을 것입니다. 백남준 선생은 지금 매우 연로하시고 몸도 온전치 않습니다.

야박한 얘기지만 선생이 살아 계실 때 그분의 기념관을 세워놓아야 여러모로 값도 헐케 먹힙니다. 사실 선생은 일본과 독일, 그리고 미국에서 미술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뭐가 잘못돼 일본이나 독일 혹은 미국에 백남준 기념관이 세워진다면 우리는 자동으로 우스꽝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만 문화를 들먹거리지 맙시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2002년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로부터 우리가 낮에는 축구 구경하고 밤에는 야시장에 가 밤새 쇼핑하는 괴상한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생각만 해도 끔찍해서 그럽니다.

조영남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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