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출신 감사의 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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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올해 상반기 한 증권사에서 감사가 교체됐다. 새로 선임된 사람은 같은 달 금융감독원을 1급으로 퇴직한 A씨였다. 그는 금감원에서 증권감독 업무를 한 경력이 있다. 이 회사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A씨의 전임자 3명도 모두 금감원이나 옛 증권감독원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보고서가 공개된 1998년 3월 이후 11년 이상 이 회사의 감사는 모두 금감원 출신이 맡았던 것이다. 이 증권사의 감사 자리는 금감원 출신이 사실상 ‘세습’하고 있는 셈이다.

또 A씨와 그 전임자의 경우 금감원 퇴직과 증권사 취업이 모두 같은 달에 이뤄졌다. 퇴직 후 갈 곳이 퇴직 전에 이미 정해졌다는 얘기다.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09년 9월 말까지 금감원 2급 이상 출신으로 금융회사 감사가 된 사람은 92명에 달했다. 이 기간 중 20개 금융회사의 감사 자리가 금감원 출신에서 같은 금감원 퇴직자로 승계됐다.

퇴직 후 민간에서 자리를 찾아야 할 처지인 관료들도 금감원의 ‘싹쓸이’에 불만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위원회 간부는 “금감원이 해도 너무 한다”며 “자리 욕심이 과하다 보니 금융감독 시스템 문제가 불거질 경우 금감원이 오해를 사게 된다”고 말했다.

제도적으로는 이를 막을 길이 없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상 금감원의 2급 이상 간부는 퇴직한 지 2년간은 퇴직 전 3년 동안 소속한 부서의 업무와 관련이 있는 민간업체에 취업할 수 없다고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효력은 별로 없다. 퇴직 전 인력개발실 등에서 일하며 ‘퇴직 전 3년’이라는 제한 요건을 ‘클리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감원 인력개발실은 계급정년에 걸려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한 간부들이 주로 가는 곳이다. 2004년 이후 감사로 취업한 92명 중 38명의 최종 보직이 인력개발실이었다. 또 금융회사와 업무 관련성이 적은 소비자센터 출신이 13명, 총무국 11명이었다. 송양호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퇴직 전의 업무와 관련된 곳에 일정 기간 취업을 못하게 하고 있지만 이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게 문제”라며 “그런 감사들이 금감원의 ‘라인’을 이용해 엄격한 감독이 이뤄지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 출신 감사가 많은 이유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금융계의 구조 탓이 크다. 금감원 입장에선 금융회사 감사 자리를 통해 고질적인 인사적체를 해소할 수 있다. 올해 금융회사 감사로 나간 금감원 출신들은 대부분 1954~55년생이다. 정년(58세)보다 4~5년 정도 일찍 나오는 대신 연봉이 높은 감사로 옮겨가는 방식이다.


민간 금융회사들도 금감원 출신을 필요로 한다. 김종창 금감원장도 최근 국정감사에서 “금감원 출신은 검사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있기에 금융사들 사이에서 인력수요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쟁도 만만찮다. 올해 초에는 보험사 감사 자리를 놓고 국장급 선후배 사이에 치열한 경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회사의 ‘기대치’는 따로 있다. 금감원이 검사를 나올 때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게 좋다는 계산 말이다. 익명을 요구한 보험사의 한 관계자는 “규제가 많아 금감원이 어떤 사안에 대해 어떻게 유권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시장의 판도가 달라진다”며 “우리 입장을 금감원에 잘 전달할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금감원 출신이 감사에 대거 진출하면 현직 금감원 직원들이 금융회사를 대하는 행태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언젠가는 퇴직해 새로운 자리를 찾아야 하는 만큼 장래의 직장인 금융회사를 엄정하게 검사·감독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다.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금융계 고위 관계자는 “요즘은 금감원 퇴직을 앞둔 사람들이 있으면 금융사들이 적합한 사람을 고른다”며 “현직에 있을 때 깐깐하다고 찍힌 사람들은 금융회사에 가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감원 출신들이 현직에서 익힌 다양한 감독 노하우를 금융회사에 전수하는 순기능도 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금감원 출신 감사가 지나치게 많고, 퇴직 후 곧장 금융회사로 이동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양대 김대식(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적어도 퇴직 전 5년 동안 했던 직무와 관련한 금융회사에는 취업을 제한해야 한다”며 “감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드러나면 더욱 엄중하게 제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김장호 총무국장은 “금융회사 감사로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적법하게 취업했다”며 “또 검사를 할 때 해당 금융회사 감사와 같이 근무한 경력이 있으면 검사반에서 제외하는 등 다양한 보완 장치가 있다”고 밝혔다.

김원배·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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