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수류탄에서 원자로까지(4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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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4. 다시 불밝힌 연구소

연구소가 활성화되려면 무엇보다 연구원들이 연구소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대덕(大德)공학센터장에 부임할 당시 대다수 연구원들은 이미 연구소에서 마음이 떠난 상태였다.

오후 4시 반만 되면 퇴근준비를 하고 5시면 어김없이 퇴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훌륭한 연구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나는 연구원들이 늦게까지 연구실에 남도록 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먼저 전 연구원을 소집해 정신교육을 시켰다.

"우리는 미국 과학자들 보다 서너배 더 노력해야 한다. 그래도 그들의 기술을 따라잡기 어렵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연구소는 오후 5시면 불이 꺼진다. 이래서야 어떻게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미국의 연구소들과 경쟁할 수 있겠는가. "

모두 숙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연구원들에게 "앞으로 오후 8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세 차례 더 통근버스를 운행하겠다" 고 말했다.

어떻게든 연구원들을 연구실에 붙들어 매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덕은 오지(奧地)라 마땅한 대중교통 수단이 없었다. 통근버스를 운행하지 않으면 대전 시내까지 나가기가 꽤 불편했다.

나는 저녁 늦게 연구실을 돌며 남아 있는 연구원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실제로 늦게까지 남아 있는 연구원들은 별로 없었다. 오랜 타성을 고치기가 쉽지 않은 탓이었다. 할 수 없이 경비원들에게 "야근자를 매일 점검하라" 고 지시했다. 연말에는 통계를 내 이들 중 10명을 특진시켰다.

그러자 당장 효과가 나타났다. 상당수 연구원들이 늦게까지 남아 연구에 몰두했다. 또 퇴근할 때는 꼭 경비원에게 '눈 도장' 을 찍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졌다. 나는 연구원들의 체력단련을 위해서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테니스장.축구장.배구장.탁구장 등을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다.

또 1982년 당시로서는 다른 연구소가 감히 상상도 못할 골프연습장 건설 계획도 세웠다. 차후 예산이 확보되면 곧바로 진행시킬 생각이었다.

연구환경 조성을 위해 쓰레기장을 방불케 한 연구소 뒷편 공터와 연구소 내부도 깨끗히 정비했다. 그랬더니 근무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이제 할 일은 빠른 시간내에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를 거두는 것이었다.

82년 3월 부임 직후 간부들에게 지시한 중수로(重水爐.CANDU)핵연료를 국산화하는 데에 온 연구소가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부임한지 한달만에 핵연료 정련.변환공장이 완공됐으나 공장 운영비가 없어 아예 가동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 공장은 화공약품을 쓰는 화공공장인지라 6개월만 운전을 중지하면 기계가 녹슬어 공장 가동이 불가능했다.

마치 새 자동차를 구입해 1년 정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못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정말 난감했다.

대덕공학센터는 정부 산하기관이라 예산회기 중간에 추가예산을 신청할 수도 없었다. 고심끝에 친정인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찾아갔다.

명색이 ADD 창설멤버였고 12년간 몸 담았던 곳인데 설마 홀대야 하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더우기 당시 ADD 소장.부소장은 나와 같은 창설멤버이자 절친한 사이였다.

서정욱(徐廷旭.66.과학기술부장관)소장은 20년 지기(知己)였고 홍판기(洪判基.66.전 대영전자공업 사장)부소장은 국산 벌컨포를 개발할 때 한 팀으로 일한 동료였다. 나는 徐소장과 洪부소장에게 구걸 아닌 구걸을 했다.

"그래도 내가 ADD 창설 멤버인데 나를 대덕공학센터에 시집 보냈으면 지참금이라도 좀 줘서 보내야 할 것 아니냐. 지금 공장 운영비가 없어 공장들이 다 녹슬 판이야. 단돈 천만원이라도 좋으니 연구비 좀 지원해 주게. " 내가 하도 떼를 쓰니까 두 사람은 "지원해 주고 싶어도 무슨 명분이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며 "뭔가 그럴 듯한 명분을 한 번 생각해 보라" 고 말했다.

나는 연구소에 돌아와 연구원들과 머리를 맞댔다.

글= 한필순 전 원자력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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