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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제 신용화폐 '지역통화시스템'] 현대판 두레·품앗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사는 주혜명(33)씨는 지난달 현금 15만원을 들여 집안에 낡은 조명기구와 전기시설을 새 것으로 교체했다.

전기 기사가 이틀 동안 맡아서 한 일이었지만 주씨는 재료비(15만원)만 주고 인건비는 '고맙다' 는 인사말로 대신했다.

그렇다면 진정 주씨는 공짜로 전기공사를 한 것일까. 법률적으로 거래된 돈은 아니지만 이들만의 '돈' 은 오고 갔다.

우리의 전통풍습인 '두레' 나 '품앗이' 를 현대판으로 개조한 '지역통화시스템' 이라는 신용화폐가 활기를 띠고 있다.

이를 도입하는 시민단체나 지자체.직장이 늘면서 이용자들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는 것. 지난 1998년 3월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미내사)' 이 회원 6백여명으로 국내 첫선을 보인 이래 서울.인천.대구지역에서 20여개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다.

지역통화시스템이란 신용을 바탕으로 서비스나 물건을 주고받으면서 현금 대신 일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일종의 '신용화폐' .

이 시스템에 가입한 회원들은 자신의 기술과 재능을 다른 회원들에게 제공하거나 받을 때마다 자신의 계좌에서 신용화폐의 잔고가 쌓이거나 빠져 나간다.

처음 회원이 되어 다른 회원에게 서비스.물품을 받기만 한다면 그만큼 다른 회원들에게 서비스나 물품을 제공해야 할 채무가 늘어나는 셈. 그렇다고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자신이 받은 것만큼 돌려 주려면 자신이 당초 제공하려던 기술이 아닌 단순 육체노동으로라도 대신할 수 있다.

미내사 이원규사무국장은 "아직 많은 회원들이 돈을 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부담스러워 해 서비스를 받기보다는 제공하겠다는 사람이 많다" 고 말했다.

지역통화시스템을 통해 거래되는 서비스나 물품은 기본적으로 현금으로 이뤄지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단지 아직까지는 시스템끼리 다중거래가 형성돼 있지 않아 해당 시스템에 가입한 사람들끼리 일이나 물건을 주고받는데 그치고 있다. 신용화폐의 이름이나 운영방식도 시스템별로 차이가 있다.

미내사의 경우 fm(future money)이란 신용화폐로 유기재배 농산물까지 구입할 수 있다. 아이들 돌보기.제주도 민박.인테리어상담 등 매월 발행되는 소식지에 왠만한 서비스는 거의 총망라되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 '송파 품앗이' 라는 제도를 운영해 온 서울 송파구는 회원들간에 컴퓨터수리.인터넷 교육.미용.피아노 레슨.영어 번역등을 송파머니(SM)로 주고 받고 있다.

지역통화시스템에 가입하려면 시스템별로 자격조건을 요구하는 곳도 있으나 대다수 자격제한은 없다. 회원 등록비를 받는 곳도 있으나 많아야 1만원. 소식지 발행과 시스템운영 경비로 쓰이는데 부족한 편. 그래서 시스템 본부가 시민단체나 지자체가 대부분이다.

지역통화시스템은 1983년 캐나다 벤쿠버 코목스밸리에서 마이클 리튼이 창안한 레츠시스템(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이 효시. 지금은 세계 각국으로 확산돼 현재 영국.뉴질랜드.미국.일본 등지에 1천여개 지역통화시스템이 가동중이다.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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