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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배 특파원의 유럽통신] 경제난에 흔들리는 공정무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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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프랑스 파리에 사는 30대 주부 코린 마르게리트는 올 초부터 지출을 지난해의 70%로 줄였다.

가구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지난해 말 금융위기의 여파로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씀씀이를 줄이기 위해 그는 식료품을 좀 더 싼 브랜드로 바꾸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기존에 사던 ‘공정무역’ 라벨이 붙은 제품을 포기했다. ‘공정무역’ 라벨이 붙어 있으면 20개 티백이 든 차 한 박스의 경우 대략 0.5유로(약 860원) 정도 비싸다. 커피 역시 20% 정도 비싸다. 마르게리트는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면서 도덕적인 소비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지만 이제는 안타깝게도 그럴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공정무역이란 미국·유럽의 대기업들이 남미산 커피나 아프리카산 카카오, 서남아시아산 차 등을 제값을 쳐서 사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현지 주민들을 저임금으로 고용해 착취했지만, 이와 달리 공정무역 제품은 정당하게 인건비를 주고 생산한 것이다. 그래서 다소 비싸지만 이들 제품을 구매하는 게 ‘윤리적인 소비’로 인식돼 왔다.

마일즈 리트비노프 등이 지은 『공정무역 제품을 사야 하는 50가지 이유』에 따르면 인도와 스리랑카의 차 농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일당은 1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다반사였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지만 공정무역이 활성화하면서 그들의 삶은 바뀌었다.

공정무역의 원조는 유럽이다. 프랑스 공정무역연합회의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5만8000t의 공정무역 식품 가운데 2만2000t이 유럽에서 팔린다. 특히 공정무역 커피는 80%가 유럽에서 소비된다. 하지만 유럽에서 경기침체로 이들 제품을 살 여력이 줄어드는 데다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제품 가격이 올라 공정무역 자체가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올 초 매장을 재단장하면서 공정무역·유기농 코너를 확장했던 파리 15구의 프랑프리에서 요즘 공정무역 제품이 자취를 감췄다.

공정무역은 제품이 조금 비싸도 이를 사주는 소비자가 있을 때만 유지될 수 있다. 요즘처럼 소비층이 줄어들면 현지 주민들의 삶도 다시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설문조사에서는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공정무역 제품을 구입하겠다”고 답변한 프랑스인은 78%였으나 올해는 60%에 못 미친다. 내가 궁한 마당에 다른 사람 생각하기 어렵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어려울 때는 없는 사람이 더 힘든 법인데, 그래도 먹고살 만한 부자 유럽이 이웃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파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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