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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 다 잡은 호랑이, 막판 3회를 못 버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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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KIA의 이종범(오른쪽)이 1회말 1사 후에 2루를 훔치고 있다. 왼쪽은 요미우리 2루수 후루키. 이종범은 나지완의 안타로 홈인해 선취점을 올렸다. [나가사키=연합뉴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팀 KIA 타이거즈가 14일 일본 나가사키 빅N스타디움에서 열린 ‘2009 한·일 클럽챔피언십’에서 일본시리즈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4-9로 졌다. 선발투수 양현종이 5와 3분의 2이닝 동안 1실점으로 호투하고, 나지완이 3타점을 올려 5회까지 3-0으로 앞섰지만 후반에 폭발한 요미우리 타선을 막지 못했다. 요미우리는 상금 2000만 엔(약 2억5700만원), KIA는 500만 엔(약 6400만원)을 받았다. 이 대결은 유례없이 치열했던 2009년 한국과 일본 야구의 마지막 대회전이었다.

경기 뒤 조범현(49) KIA 타이거즈 감독은 짙은 아쉬움을 내비쳤다. “주축 선수들이 없는 상황에서 좋은 경기를 했다. 양현종을 받쳐줄 불펜의 힘이 모자랐다. 힘이 있는 요미우리와 힘으로 붙어보고 싶었지만 조금 모자랐다.” 출국 전에 “야구가 안 되면 씨름을 해서라도 이기고 싶다”고 했던 그였다.

 하라 다쓰노리(51) 요미우리 감독은 자부심 내지 우월감이 강한 인물이다. 외국인선수 2명과 윤석민·이용규까지 없는 KIA에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요미우리가 지고 있을 때 그의 얼굴은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양현종이 대단한 투구를 했다. 윤석민까지 있었다면 승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역전승을 거둔 뒤에야 그는 KIA에 립서비스를 할 여유를 찾았다. 한국의 야구, 일본의 야큐(野球)의 만남은 이렇게 흘러간다. 여전히 야구가 도전자 입장이지만 긴장은 야큐가 더 많이 하는 듯하다.

2009 한·일 클럽 챔피언십 4-9로 져
요미우리는 가장 ‘일본다운’ 야구팀이다. 1934년 일본 최초로 프로야구단을 창단해 75년 동안 일본 야구를 대표했다. 가장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고, 성적도 단연 뛰어나다. 올해까지 센트럴리그 우승 32차례, 일본시리즈 우승 21차례를 차지했다.

일본은 세계대전 패망 후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라는 야구에 열을 올렸다. 그들에게 야구는 미국과의 대리전이었고, 요미우리가 맨 앞에 섰다. 실제로 요미우리는 메이저리그 편입을 시도한 적도 있다. 올해 미국 월드시리즈에서 동양인 최초로 MVP에 오른 마쓰이 히데키(뉴욕 양키스)는 2002년까지 요미우리 4번 타자로 활약했다. 요미우리 타자들의 헬멧에는 ‘자이언츠 프라이드’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메이저리그를 넘보는 일본 야구의 자긍심을 부각한 것이다.

한·일 챔피언 결정전 엔트리에 포함된 요미우리 선수들의 올해 연봉 총합은 30억 엔(약 400억원)에 이른다. 메이저리그 구단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이승엽 연봉만도 6억 엔(약 80억원)이다. 반면 요미우리와 맞서는 KIA 선수 24명의 연봉 총액은 15억6000만원. KIA의 주축 선수가 많이 빠진 결과이긴 하지만 요미우리의 4% 수준에 불과하다.

KIA는 가장 ‘한국적인’ 구단이다. 한국 프로야구는 82년 군사정권 아래서 태동했다. 정치적 소외감을 느꼈던 호남인들은 연고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열광했다. 해태는 83년부터 97년까지 9차례나 한국시리즈 챔피언에 오르며 민심을 마취했다. 어쩌면 한국의 한(恨)을 가장 잘 담아낸 팀이 해태였다. 그들은 삼성(대구)·LG(서울) 등 부자 구단들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선동열·김성한·이종범 등 해태의 최고는 곧 한국의 최고였다. 정치·경제적으로 약자였기에 그들은 더 독했고 강했다. 지금은 ‘타이거즈 근성’으로 추억되는 정신력이다.

2001년 KIA로 간판을 바꿔 단 타이거즈는 올해 12년 만에 한국시리즈 패권을 탈환했다. 이젠 한풀이 상대가 바뀌었다. 일본 야구를 상징하는 요미우리다. 쉽게 이길 수 없는 상대였지만 KIA는 안간힘을 쓰며 싸웠다. 요미우리다운, 또 KIA다운 일전이었다.

자이언츠 프라이드와 타이거즈 근성
양국 프로 출범 후 최초의 한·일 교류전은 91년 수퍼게임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일본 대표팀에 3연패 당한 뒤 2승을 거뒀고 마지막 경기에서 패해 2승4패를 기록했다. 4차전부터 일본의 정예 멤버가 빠졌다. 한국 최고 타자들은 일본 투수들의 포크볼에 속수무책이었다. 포수 이만수는 날쌘 일본 주자의 뜀박질을 막지 못했다. 최고 유격수였던 류중일의 송구는 타자 주자가 1루를 밟은 뒤에야 도착했다. 맥 없던 수퍼게임은 99년 3회 대회를 끝으로 사라졌다. 일본은 한국을 상대하는 데 흥미를 잃었고 미국의 베이스볼(Baseball)에 도전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수확은 있었다. 수퍼게임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했던 선동열과 이종범은 일본 주니치에 입단했다.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대표팀은 이승엽의 맹타와 구대성의 호투를 앞세워 일본을 두 차례나 꺾고 동메달을 따냈다. 이때 일본은 최고 멤버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 야구를 애써 모른 척했다. 2001년 구대성은 오릭스, 2005년 이승엽은 지바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세계 야구의 축제인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2006년 처음 열렸다. 일본 대표팀의 리더 스즈키 이치로(시애틀)는 아시아 예선에 앞서 “앞으로 30년 동안 일본 야구를 넘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호언했다. 누가 들어도 한국을 겨냥한 독설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아시아 예선과 미국 본선에서 일본을 연파했다. 이때 스타는 일본 야구를 경험한 이승엽·이종범·구대성 등이었다. 준결승전에서 일본을 다시 만나 지긴 했지만 야큐는 처음으로 야구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는 8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이때도 이승엽의 홈런포가 일본을 무너뜨렸다. 지난 3월 제2회 WBC에서 두 팀은 예선과 본선에서 총 4차례 대결해 2승씩을 나눠가졌다. 투수 봉중근과 4번 타자 김태균은 일본에는 낯선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결승에서 벌인 5번째 대결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베이스볼을 향한 야큐, 야큐를 향한 야구
당시 김인식 대표팀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잘해줬지만 그래도 아쉽다. 일본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라고 입맛을 다셨다. 야구는 어느새 야큐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반면 일본은 충격을 꽤 받았다. 2라운드 최종전에서 우쓰미 데쓰야가 이용규를 향해 던진 위협구, 결승전에서 나카지마 히로유키가 2루수 고영민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진 베이스 러닝 등에서 그들의 초조함을 읽을 수 있었다. 일본은 2회 연속 WBC 우승을 했다. 그들은 “우리가 세계 제일”이라고 외치면서도 뒤통수가 가려웠다. 한국을 개운하게 이기지 못한 탓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최고의 한·일전은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 한대화의 3점 홈런으로 승리했던 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였다. 그건 기적이었다. 이후 세 차례 수퍼게임에서 나타난 야구와 야큐의 격차는 확연했다. 그러나 10년도 지나지 않아 한·일 야구의 간극은 많이 좁아졌다. 이젠 일본도 한국을 ‘숙적’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고교 야구팀은 4000개가 넘는다. 한국 고교 팀은 50여 개. 야구 자원은 야큐의 1.25%에 불과한 셈이다. 엘리트만 모아 놓은 대표팀이 아닌 단일팀 간의 대결에서는 일본 전력이 객관적으로 훨씬 앞선다.

일본 야구를 직접 경험했던 선동열 삼성 감독은 2005년 처음 열린 아시아시리즈에 앞서 “망신만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단일팀으로 일본시리즈 우승팀을 이기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의지도, 자신감도 없었던 삼성은 지바 롯데에 두 경기를 모두 내줬다. 2006년에도 삼성은 니혼햄에 대패했다.

김성근 SK 감독은 훨씬 공세적이었다. 2005년부터 2년간 지바 롯데에서 코치를 지냈던 그는 2007년 예선전에서 주니치를 정면으로 겨냥했다. 그리고 김광현을 내세워 6-3으로 이겼다. SK는 결승에서 주니치와 재회해 5-5 동점까지 만들었지만 결국 1점 차로 석패했다. 지난해 SK는 세이부와의 예선전에서 4-3으로 이겼다. 대만에 일격을 당해 결승에 오르지 못했지만 일본은 단일팀 간 대결에서도 안심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클럽 대항전도 한·일 경기라면 전쟁처럼 치열해졌다.

최고의 흥행 카드, 한·일전
2009 한국 프로야구는 역대 최다 관중(592만5285명)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과 WBC의 눈부신 성과가 많은 스타와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한국 야구가 세계 수준에 올라섰다는 자긍심이 폭발했다. 그 배경에는 매번 명승부를 연출했던 한·일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야구의 세계화를 꿈꾸는 WBC 대회 사무국도 한·일전을 최고 흥행 카드로 꼽았다.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이고에 몰려든 한국과 일본 교민이 자국 선수들을 보러 온 미국 팬보다 훨씬 많았다.

일본 도쿄에서 4년간 열렸던 아시아시리즈는 지난해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일본에서 관심도가 떨어지는 대만 우승팀과 중국 대표팀까지 4개국이 겨뤘던 탓에 적자가 2억 엔에 달했다. 그러나 한·일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지방자치단체(나사사키)의 지원을 받아 일본시리즈 우승팀과 한국시리즈 챔피언의 단판 승부를 기획했다. 일본은 향후 한·일전을 특화시켜 매년 대회를 열겠다는 생각이다. 야큐의 정교함과 베이스볼의 파워를 이종 교배하는 데 성공한 한국 야구를 라이벌이자 파트너로 인정한 것이다.

2007년 아시아시리즈를 앞두고 일본의 한 야구인은 김성근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탁합니다. SK가 주니치를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야큐는 십수년째 정체돼 있거든요. 미국을 따라가지 못한 채 한국에 추격당하고 있습니다. 일본시리즈 챔피언이 한국시리즈 우승팀에 진다면 정신이 번쩍 들 겁니다. 한국 야구는 이제 그럴 힘이 있고요. 앞으로 두 나라가 경쟁하며 발전하는 관계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땐 세계 정상에서 대결할 수도 있겠지요.”

나가사키=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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