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아직도 가신정치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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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월 1일자 한겨레신문 '취재파일' 에서 정치부 성한용 기자는 '동교동계의 전횡' 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현 정권과 민주당의 이른바 실세라인은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남궁진 청와대 정무수석-김옥두 민주당사무총장-최재승 기조실장-윤철상 사무부총장' 으로 이어져 있다. 이 가운데 한실장만 동계동 색깔이 옅은 편이고 나머지는 서로를 '형님, 동생' 으로 부르는 이른바 '가신(家臣)' 출신이다. " 이들 가신조직이 당 인사를 밀실에서 주무르고 있고 곧 있을 공천심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올바른 공천결과가 나올지를 걱정하는 기자의 우려를 토로하고 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불현듯 한장의 사진이 뇌리에 스쳤다. 대선 전인 97년 9월 'DJ위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이라는 설명이 붙었던 사진이었다.

한보사건으로 YS의 가신출신인 홍인길 의원과 아들 김현철씨가 구속된 후, DJ 비서출신 7인이 어깨동무를 하고 "집권시 어떤 공직도 갖지 않겠다" 는 비장한 결의를 다짐한 사진이었기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한두명의 차이가 있지만 위에 열거한 가신 모두가 '백의종군' 사진속의 인물들이고 지금껏 이들이 청와대와 당에서 여전한 실세로 군림하고 있다. 그때의 맹세는 다 어디로 갔는가.

가신정치.패거리정치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생겨난 불가피한 산물이다. 과(過)도 있지만 공(功)도 있다.

그러나 문민정부를 거쳐 정권교체를 이룩한 지금은 청산의 대상이지 결코 조장해선 안될 잘못된 풍토다.

4년 전 YS정권때 장학로씨 비리사건이 터지자 나는 중국 한(漢)고조 유방(劉邦)의 고사를 인용해 가신정치의 폐단을 지적한 적이 있다.

한 고조 유방은 좋게 보면 의협심과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였지만 나쁘게 보면 거리의 건달이었다. 그가 거리의 패거리들을 모아 집권을 했다.

실세들끼리 파티도 열어 지난날 고난의 역정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오늘의 영광에 샴페인을 터뜨리며 술에 취해 상하 없이 왕년의 건달로 돌아갔다.

유방의 어깨를 툭툭치면서 '형님' 하며 외치질 않나, 청탁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툭하면 기둥에 칼을 날려 꽂기도 했다. 보다 못한 유생 손숙통(孫淑通)이 황제에게 간했다.

사적 관계를 공적 관계로 전환해야 하고 이를 위해 법적.제도적 장치에 따라 인재등용을 하기를 진언했다. 이후 유방은 한신(韓信)과 소하(蕭何)같은 가신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간다.

왜 사적 관계에서 공적 관계로 전환을 해야 하고 인치 아닌 법치로 나가야 하는가. 사적 막료로서 가신은 요즘 말로 다운업식(하의상달)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업 다운식(상의하달)복종체제에 너무 익숙해 리더의 지시에 따를 뿐 불복이나 이견(異見)개진이 용납 안되는 조직이다.

더구나 우리네 가신그룹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생겨난 일종의 의협단체다. 비슷한 정치경력, 비슷한 사상체계, 비슷한 출신지역에 리더를 향한 강한 충성심으로 뭉친 협객단체다.

조직 속성상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강한 도덕적 우월성에 스스로 빠져든다. 때문에 이런 가신그룹에 의해 당과 청와대가 장악되면 대통령 스스로 인치의 세계에 함몰되거나 타 정파나 집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 교훈은 이미 지난 정권에서 충분한 학습을 통해 체득한 바 있다.

지금 시민단체가 나서서 선거혁명을 외치고 뭔가 이뤄질 것 같은 바람을 타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질서로 2대째 자리잡은 가신정치의 잔재를 일소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후진적 '제후(諸侯)정치' 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고 새로운 정치문화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가신정치의 현대적 전환이 일본식 내각제라고 본다. 3金씨들이 아직도 내심 내각제에 연연하는 이유가 바로 내각제를 통한 가신정치의 영구화에 있지 않을까. 따라서 낙천.낙선운동의 핵심은 가신그룹 같은 비민주적 정치집단을 어떻게 하면 우리 정치에서 청산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밀실 공천을 통해 패거리정치를 정당정치로 위장하는 구시대 낡은 정치구도를 깨는 진정한 의미의 선거혁명으로 승화될 수 있다.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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