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어린이 책 BOOK] “산골서 몸 쓰며 사니 생각이 깊어지네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도시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지만 시골에서는 어제를 돌아보며 오늘을 살아요. 그런 되돌아봄이 참 좋네요.”

귀농 10년차. 사진가 이창수(49·사진)씨는 편안해 보였다. “올해는 전시회 때문에 감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작황이 안 좋다”는 말 속에서도 안달복달 절박함은 없었다. 라면 대신 국수를 끓여 먹고 산새 소리에 잠이 깨는, 지리산의 ‘슬로우 라이프’가 그의 표정 속에서도 읽힌다.

그는 최근 포토에세이 『내가 못 본 지리산』(학고재)을 펴냈다. 지난해 5월부터 중앙SUNDAY에 연재 중인 ‘지리산에 사는 즐거움’을 모은 책이다. 책 속에는 그의 1년 산촌 생활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봄엔 녹차, 여름엔 매실, 가을엔 감을 거두며 사는 농부의 삶이다.

그는 2000년 서울을 떠나 지리산(경남 하동군 악양면)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월간중앙·샘이 깊은 물 등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한 지 16년 만이었다.

“차 농사가 쉬워 보였어요. 일 년에 두 달만 고생하면 되는 줄 알고…” 농반 진반 털어놓은 귀농 이유다. 차 농사는 쉽지 않았다. 어쩌다 오는 도회지 친구들만 그의 ‘봉두난발’ 녹차밭을 보고 “멋있다” 감탄했다. 이웃 농부들에게선 “약을 치든, 사람을 쓰든 풀을 뽑아야지 차밭 꼴이 이게 뭐냐”란 걱정을 듣기 일쑤였다. 찻잎을 덖는 과정은 더 힘들었다. 덖는 것이란 300도를 넘나드는 무쇠솥에 찻잎을 넣고 뒤섞어 익히는 과정이다. 장갑을 다섯 개나 겹쳐 끼고 열기와 싸우며 속도전을 펼쳐야 했다.

그렇게 땀을 흘렸는데도 첫 해 농사 수익이 서울에서 받았던 한 달치 월급에도 못 미쳤다. 초등교사였던 아내까지 사표를 내고 동참했으니 경제적으론 크게 밑지는 장사였다. 녹차와 매실액·곶감 등을 팔아 그럭저럭 생활비를 댈 수 있었던 건 그 뒤 5년이나 더 지나서였다. 그래도 그는 지리산 생활에 점점 푹 빠졌다. “농사일이란 게 몸은 바쁘지만 정신적으론 여유가 있는 일”이어서다. “몸을 쓸수록 생각이 깊어진다”는 깨달음도 크다. 물론 찻잎을 덖을 때 그윽하게 퍼지는 익은 차 향기도 그를 붙드는 매력이었다.

그는 “10년 주기로 삶에 변화를 주고 싶다”고 했다. 이제 지리산 정착 10년. 그래서 그는 올 5월 ‘지리산 학교’를 만들어 초대 교장 자리에 올랐다. 지리산에 사는 예술가들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도예와 목공예·시문학·천연염색 등을 가르치는 일종의 문화센터다. 그는 사진반을, 그의 아내는 퀼트반을 맡았다.

“환갑 때까지는 지역사회를 위한 일을 하려고요. 그래서 지금은 학교일에 올인하다시피 해요. 하지만 지리산 학교가 제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의 말에는 끝까지 여유가 묻어났다.

이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