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구 교수의 '설을 맞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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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고향에는 가야만 한단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17시간이 걸리더라도 고향에는 가야만 한단다.

교통사고 사상자가 1천명이 넘어가도, 승용차 연료비로 1천억원에 가까운 돈을 태우면서도…. 마치 성지를 찾아가는 순례자들처럼 어떠한 괴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연인원 3천만명이 길을 떠난다.

설과 추석의 엄청난 귀성인파를 두고 한민족의 독특한 풍습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이들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에는 '오봉(お盆)' 이 있고 중국에는 '춘절(春節)' 이 있다. 미국도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는 흩어졌던 가족이 모이느라 난리다.

이런 모든 것을 감안해도 우리의 경우는 '민족의 대이동' 이랄 정도로 유난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일차적으로는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따른 이농(離農), 특히 수도권에 사람들이 생활의 둥지를 틀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화가 아래로부터 차근히 이뤄진 게 아니라 위로 부터 달성된 것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개인적인 휴가는 적고 정부에서 획일적으로 지정한 공휴일이 많은 것도 그런 탓이다.

일터에서 놓여나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이 적은 우리 실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의 동시에 고향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설이 어려우면 대보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의 자치' 를 확대해 가는 것은 아직 꿈인 것 같다.

설에 고향을 찾는 일은 마치 하나의 종교적 의례같다.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떠나는 성지순례의 축소판인 우리들의 귀향. 설렘을 가득 안고 추억의 공간으로 떠나는 귀향은 세 단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첫째 바쁘고 힘든 일상생활을 떠나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떠난다는 '분리의 단계' 다.

고난에 찬 기나긴 여정을 통해 평범한 공간인 일상으로부터 성스러운 공간인 고향으로 이동이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둘째 고향과의 만남, 그리고 부모 친지와의 만남을 통해 '합일(合一)' 을 경험하는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으로 이루어진 단계다. 고향이란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곳인가.

직업이나 교육 또는 사업 때문에 살고 있는 낯설고 각박한 타향과는 달리 고향은 비록 가난하고 배는 고팠지만 어린시절의 순수함과 애틋한 추억이 어려 있는 곳이 아니던가.

고향 방문이란 '좋았던 옛 시절' 의 기억을 되살릴 뿐 아니라 따뜻한 가족의 정도 느끼게 해준다. 약간의 성공과 출세를 뽐낼 수도 있고, 반대로 실패와 좌절에 대한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고향과 가족은 이해타산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일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름다운 세계' 가 아니던가.

셋째 다시 서울 또는 자신이 사는 곳으로 돌아오는 '재결합의 단계' 다. 이제 고향방문이라는 성스러운 휴식의 시간은 끝나고 다시 번잡한 일상생활로 복귀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귀성은 종교적 의례와 구조적으로 매우 닮았다.

방과 마루를 들고날 때 문지방을 밟지 말라는 조상들의 금기는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의 '경계' 는 위험하니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일상의 공간에서 성스러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귀성길이나 그 반대로 고향에서 돌아오는 길은 문지방과 마찬가지로 삼가고 조심해야 할 이전(transition)의 공간이다.

공간적 차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시간적으로도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해로 넘어가는 이전의 시기다.

이런 문화적.심리적 의미를 담고있는 만큼 앞으로 귀성 '전쟁' 이니 특별수송 '작전' 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말은 하지말자. 고향을 찾는 순례자들이라면 마치 전쟁하듯 아귀다툼하며 빨리 가야할 필요는 없다.

교통관계 당국에서도 '더 빨리, 더 많이' 라는 양적 목표만 강조하기보다는 흐뭇하고 안전한 귀성길이 되도록 질적인 목표를 세우도록 하자. 무자비한 생존경쟁을 벗어나 푸근함과 따뜻함, 진정한 인간다움을 맛보러 오가는 고향길인 만큼 오가는 길부터라도 조금씩 바꾸어보자.

길이 막혀 빨리 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화를 내지는 말자. 핸들을 잡은 아빠는 다른 차나 세상을 욕하지 말자. 모처럼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고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보자. 그간 틈이 없어 못했던 이야기를 실컷 나누어보자.

성지를 찾아 떠나는 순례자가 마음을 가다듬듯이, 고향 가는 길에서부터 어린 시절의 순박함과 아름다움을 되찾아 보자. 가족의 푸근함과 넉넉함을 만끽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부터 시작해보자. 바쁘고 힘겨운 일상생활에서는 그렇게 못했지만 적어도 고향 가는 길에서는 질서도 지키고 양보도 해보자.

그리고 고향과 가족친지의 따뜻함과 넉넉함을 지니고 고향에서 돌아오자.

한경구(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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