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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세상] 출근 길 버스에서 느낀 단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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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버스에선 최신 가요가 간간이 흘러나오는데 내 귓속엔 흘러간 옛 노래 ‘여덟 시 통근 길에 대머리 총각’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어쩌다 혼자서 볼 일이 있을 때 시내버스를 타

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매일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맛은 새로웠다. 아침 일찍부터 옷차림을 다듬고 경쾌한 구두소리로 복잡한 아파트 숲, 쌍용동에서 숲 속으로 가는 특이한 출근길이다. 그동안 나는 맘껏 여유를 즐기며 오후 1시에 가까운 곳으로 걸어서 출근을 했었다.

600번은 30분에 한 번씩 천안종합터미널을 출발해 광덕산 숲 속으로 간다. 나는 여기 2번 종점에서 환승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시내버스 환승제를 곰지게 활용하는 셈이다. 저만치 세 자리 수라서 빨간 불이 더 큰 버스가 모습을 보이면 난 금세 600번이란 걸 알 수 있다. 숲 속으로 가는, 시골로 가는 버스라서 한적할 줄 알았던 나는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등산복을 입은 이들이 시내버스에 빼곡히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손님이 유난히 더 많은 날이 있는데 그날은 음력으로 초하루이거나 보름날이어서 절에 가는 신도들이 많이 탄 날이란다. 그런 날은 읍내로 여고 다닐 때 안내양이 출입문을 두드리는 신호로 출발과 정지를 알리던 통학버스를 탄 것처럼 더 붐벼서 잠시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낮은 숲에는 한동안 초록이 넘실대더니 언제부터인지 조금씩 조금씩 초록이 변하고 있었다. 어제도 그제도 꼼꼼히 마사지를 하고선 천천히 화장을 시작한 새색시처럼 아주 조금씩 산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기초화장을 마치고 두 볼을 톡톡 두드리며 화장을 시작한 여인네의 얼굴이었다. 산이 색조화장을 시작할 무렵, 풍세천의 가을 물엔 오리들의 군무가 시작되었다. 얼마 전까지 천변에 펼쳐졌던 코스모스의 화려한 춤사위를 눈 여겨 보아두었던지 물속에서, 물위에서 펼치는 오리들의 춤 동작이 다양하다. 대형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싱크로나이즈드스위밍 선수들의 공연이 멋지다. 더구나 덩치 큰 시내버스에서 넓은 차창을 통해 보는 풍경은 작은 승용차에서 바라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햇살이 아직은 지면과 예각을 이루는 때, 그래서 산도, 들도, 코스모스도, 냇물도, 냇물의 오리들도 더 아름답게 보인다. 대형 모자이크를 이루었던 누런 벌판이 갓 중학교에 입학한 막내아들의 머리통처럼 하나 둘 말끔히 이발을 시작했다. 농부들이 기역자를 쓰는 낫의 모습으로 허리를 굽히고 줄 서서 해 저물도록 낫질하던 때는 추억이 됐고 넓은 논배미를 차곡차곡 돌아다니며 벼 베기, 탈곡을 동시에 해결하는 기계가 여유롭다.

어느덧 가을 산이 화장을 끝마치는가 싶더니 그 모습 보려고 산에 오르는 손님들이 부쩍 많아졌다. 산은 더 고운 모습을 보이려 하늘거울에, 호수거울에 비춰보고 사람들은 그 모습도 어여쁘다 다투어 산에 오른다.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의 무리 속에 다시 무언가를 땅에 심을 씨앗을 사 들고 버스에 탄 노인들도 있다. 시내버스 안내방송이 ‘다음은 보산원초등학교입니다.’ 하여 의자에서 내 몸을 일으킨다.

박상분(천안보산원초교 인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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