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그래도 법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시민단체의 낙선.낙천운동 바람이 거세다.

곳곳에서 '명단' 을 발표하며 저마다 선거개혁을 외치고 있다.

이를 시민혁명이라고 표현하는 학자도 있다.

기존 정치권의 행태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며 환호하고 있다.

쉽사리 바뀔 것 같지 않던 정치판이 새로운 전기를 맞는 계기가 될 것이 틀림없다.

새 천년 총선에서는 썩은 정치권을 반드시 바꾸고 말겠다는 시민단체의 순수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진행과정에는 문제가 있다.

바로 선거법 위반 부분이다.

중앙선관위는 경실련이 10일 공천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하자 17일 전체회의에서 이를 사전선거운동에 해당하는 선거법 위반이라고 유권해석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경고에 그치지만 되풀이될 경우 고발하겠다고 엄포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선관위의 해석에 시민단체들은 선거법 불복종운동을 폈고 19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시민단체의 선거활동 금지는 권위주의적 발상' 이라며 '법으로 규제할 수 없는 일' 이라고 밝혔다.

金대통령은 4.19와 6.10항쟁을 예로 들기도 했고 '동창회나 향우회에도 선거운동을 허용해야 한다' 고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대통령의 이 말은 시민단체측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어서 24일 총선시민연대는 개선장군처럼 공천반대인사 명단을 발표했다.

반면 대통령의 뜻과 다른 법 해석을 내린 선관위는 헌법기관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할 위기에 놓였다.

검찰도 법집행을 미룬 채 권력의 눈치만 보는 초라한 꼴이 됐고 동시에 선거법은 사문화돼 버렸다.

이래도 되는가.

법률이 힘있는 다수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짓밟혀도 괜찮은가.

시민단체의 선거운동이 국민의 뜻이고 대세라고 법 유린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정치권 물갈이가 시급하고 어차피 개정키로 한 법률이니 무시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떤 이유로든 법을 어기는 행위가 칭찬받아서는 안된다.

누구도 법의 존엄성을 훼손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시민단체 대표들이 굳이 선거법을 어기면서 공천반대인사 명단을 발표한 것은 잘못이다.

여야가 개정작업에 착수했으므로 며칠 기다렸으면 법을 어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큰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작은 잘못이라 해도 충분히 법을 지킬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쉽다.

또 이들의 행동을 흉내내 법 경시 풍조가 유행하지 않을까 두렵다.

낙선운동의 정당성 평가와 범법에 대한 처벌은 다른 차원이다.

그러므로 민주사회의 시민단체 대표라면 이제라도 범법행위의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 절차를 자청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법 개정이 되면 기껏해야 면소(免訴)나 공소취소 정도가 고작일테고 결과적으로는 처벌이 훈장처럼 오히려 명예로울 가능성도 있다.

가벌성이나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처벌을 강조하는 이유는 시민단체 지도자라면 동기나 목적의 순수함을 강조하기에 앞서 법의 존엄성과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기본원칙 실천에 모범을 보일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준법질서 확립은 시민단체들이 주장하는 정치권 물갈이 운동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명단에 오른 정치인들의 '음모론' 주장에 시민단체측은 명예훼손이라며 법적 대응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좋은 예다.

시민단체 자신들은 법을 어겨놓고 상대방에게는 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며 법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난센스 아닌가.

검찰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TV 생중계속에 행해진 집단적인 선거법 위반행위를 입건조차 않은 것은 분명한 직무유기다.

대통령의 말은 법개정의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지 실정법 위반행위를 눈감아주라는 뜻은 아니라고 해석해야 한다.

대통령이 법률 위에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검찰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생각해 볼 시점이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선관위 법해석이 하루아침에 공염불이 되고 검찰이 범법행위를 나몰라라 하는 나라는 법치국가라 할 수 없다.

무력한 검찰의 모습을 보노라면 동창회.향우회까지 가세할지도 모를 이번 총선이 무법천지가 되지 않을지 벌써 걱정이 앞선다.

권일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