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반대 명단파문] JP "공동정권 누구 덕인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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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5일 오전 자민련 마포당사 엘리베이터 안. 출근하던 김종필(金鍾泌.JP)명예총재의 시선이 벽에 붙어 있는 '오늘의 명구(名句)' 에 멈췄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따위의 근성은 자비로운 비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이면서도 아무 것도 낳지 못하는 불모의 사막과 같다' -페르시아 속담.

5층 명예총재실에 카메라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자 그는 문 밖에 가만히 서있었다.

보좌진이 기자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난 뒤에나 사무실로 들어갔다.

옆에서 누가 인사말을 건넸으나 JP는 한 마디도 응답하지 않았고, 경직된 표정은 잠깐 동안에도 굳어져 갔다.

한 측근은 "JP는 1995년 김영삼(金泳三.YS)정권으로부터 쫓겨날 때보다 더 극심한 분노에 휩싸여 있다" 고 설명했다.

그는 "공동정권을 누가 만들어 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는 게 JP의 심정" 이라고 덧붙였다.

JP는 총선시민연대의 정계 은퇴 권고를 '여권 핵심의 얼굴없는 퇴진 공세' 로 인식하고 있다고 한다.

당직자들은 "YS는 토사구팽(兎死狗烹.토끼 사냥을 끝내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을 해도 당당한 면은 있었다" 며 정치적 음모를 확신하고 있었다.

이날 이한동(李漢東)총재권한대행 주재의 간부회의에서 27일로 예정된 DJP 회동을 거부키로 한 결정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김현욱(金顯煜)사무총장은 사실상 공동정권 철수를 선언했다.

심지어 박태준(朴泰俊)총리의 철수 문제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이 모든 게 JP의 구상에 따른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DJP 회동 거부로 시작한 JP의 공동정권 철수 작업이 단순히 감정적 대응은 아니라는 게 명예총재실쪽의 얘기다.

총선에서 살아남기 위한 JP의 계산된 절규라는 것. 실제로 JP는 'YS 팽 사건' 이후 자민련을 독자 창당해 충청지역을 누비며 희생당한 JP 이미지 부각에 성공한 경험이 있다.

내각제 연내 개헌 포기, 우왕좌왕했던 합당 무산 과정 등으로 지역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는 JP가 이번 사건을 극적인 반전(反轉)의 기회로 활용할 것이라는 설명은 바로 이런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칫하다간 자민련은 존재도 없이 사라지고 새천년민주당-한나라당 양당 구도가 고착되는 것을 JP가 가장 염려하는 대목이라고 한다.

JP는 총선에서 현재대로 3당 구도 유지에만 성공하면 민주당뿐 아니라 한나라당과도 자유롭게 정책적 연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인 것으로 알려졌다.

총선연대의 낙천운동이 공동정권 균열, 정계개편 가속화로 이어지는 형국이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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