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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황순원 문학상] 소설 - 정지아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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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가을로 접어드는 토요일 오후 남편과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동해안으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길이다. 내가 부모님과 함께 가족 나들이를 나선 건 20년 만이다. 6.25 때 남로당 전남 도당에서 일했던 아버지와 남부군 출신인 어머니는 혁명의 열정으로 불탔던 젊은 시절, 당시 불과 오륙년의 경험에 자신을 옭아매고 칠순을 훌쩍 넘은 늘그막까지 악착스럽게 살아왔다. 아직도 모든 대화의 끝이 빨치산 시절로 귀결되는 그들에게 여행은 가당치 않은 호사였던 것이다.

그나마 이번 여행은 아버지의 일흔일곱번째 생일을 맞아 성사됐다. 혼자서는 50m도 걸을 수 없게 된 어머니가 아버지의 제안에 선선히 동의했다. 어머니는 여섯살 때부터 근 10년을 살았던 사실상 고향인 동해안의 작은 마을 운포를 60여년 만에 찾아가고 싶었던 것. 어렵사리 옛날에 살았던 집 부근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 모습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북녘 땅에서 가장 가까운 통일전망대를 찾아 영정용 사진이라며 독사진 한 장씩을 찍는다.

<'창작과 비평' 2003년 가을호 발표>

*** 빨치산 부모와의 여행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

소설가 정지아씨는 빨치산이었던 부모의 역정을 마치 실록을 작성하듯 담담하게 써내려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로 1990년대 초반 필화(筆禍)를 겪었었다. 88년 '실천문학' 겨울호부터 연재된 소설이 90년 세 권의 책으로 나오자 두 달 만에 10만권 가까이 팔렸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지만 책은 곧 판매금지됐고 정씨는 수배당했다.

정씨는 황순원문학상 후보작으로 오른 중편소설 '행복'이 "부모님의 삶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빨치산의 딸'과 다를 게 없지만 나를 걸러서 나온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다르다"고 밝혔다.

"'빨치산의 딸'이 문학적으로,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쓴 것이다 보니 글 쓰는 사람 입장에서 아까운 측면이 있었다"는 것. "평생 써도 못 쓸 얘기를 너무 일찍 끝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소설 속 가족 여행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북한 당국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북한행을 택한 미전향 장기수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아버지를 주인공 '나'는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다.

정씨는 "90년대 이후 역사는 무게를 상실했다. 행복이든 뭐든, 모든 게 소소해져 개인의 영역이 급속도로 떠올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좌표'를 잃어버린 각 세대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설가 정씨에게 '빨치산 부모'는 조금 부담스러운 듯했다. 정씨는 "지금까지 역사라는 틀에 짓눌린 개인의 모습을 그려왔다면 앞으로는 역사를 배경으로 한 개인의 사소한 얘기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한때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가 지금은 뒤편으로 조용히 물러나 있지만 비굴해지지는 않은, 개인의 차원에서 양심을 지키고 역사를 거스르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권성우씨는 "오랜만에 문학적 감동을 느꼈던 소설이다. 가슴 깊이 담아두었던 얘기를 절절히 풀어내 체험의 진정성 측면에서 문학적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평했다. 권씨는 "정지아의 소설 중 가장 빛나는 소설이라고 할 만한데 다음 작품들에서 '행복'을 넘어서는 성과를 거두어야 정씨의 문학적 깊이도 무르익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준봉 기자

◆ 정지아 약력

-1965년 전남 구례 출생

-8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 소설집 '행복'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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