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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병욱칼럼] 정치 그 빛과 그림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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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해(年)와 세기, 그리고 천년대를 보내고 맞으며 우리 정치에는 작은 기대와 큰 실망이 교차하고 있다.

올해 내내 국민에게 걱정만 끼쳤던 정치는 새해에도 희망을 주는 작은 불씨에도 불구하고 걱정과 실망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여야가 세기와 천년대가 바뀌는 대전환의 시기를 맞아 지금까지의 정치행태를 반성하고 국민대화합의 정치를 다짐한 것은 한번 더 속더라도 믿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심정이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9일 송년담화를 통해 "문제가 된 사건들에 대해 원칙있는 처리를 통해 최대한 관용하겠다" 고 다짐했다.

이에 앞서 이회창(李會昌)한나라당 총재도 조건 없는 여야 총재회담을 통해 새해에는 희망의 정치를 해나가자고 제의했다.

이만섭(李萬燮)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은 金대통령의 담화를 부연해 그동안 대립의 불씨가 돼 왔던 여야간의 고소고발을 취하하겠다고 했다.

오랜 정치보복의 역사를 겪어 온 우리에겐 칼같은 법집행보다는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집권측의 금도(襟度)와 관용이 더 소망스럽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정치가 한발짝도 못 나가고 각박해지기만 해 온 지난 2년의 정치 불모에선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그러자면 과거와 선을 긋고 용서와 화해, 그리고 미래로 나가는 어떤 전기가 필요하다. 세기와 천년대가 바뀌는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적기일 것이다.

새 시대의 큰 정치에 대한 실낱 같은 소망에도 불구하고 정치개혁입법에 대한 정치권의 행태는 그 작은 기대마저 흔들고 있다. 국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인과 정당의 이해에만 집착해 원칙도 없는 주장을 하거나 서로 야합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정치제도를 개혁한다면서 오히려 개악(改惡)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선 도농(都農)복합선거구제란 듣도 보도 못한 제도로 하루가 시급한 선거법협상이 해를 넘기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다.

중선거구제를 주장하다 안될 것 같으니까 농촌은 소선거구, 특별시.광역시 등 대도시는 중선거구의 비빔밥식 제도로 바꾸자는 것이다.

영남권 대도시의 자민련 소속 의원들이 소선거구로는 가망이 없으니 활로를 열어주자는 것이 이 해괴한 제도를 고집하는 속셈이다.

중선거구제도 자체도 망국적인 지역정당구도 해소란 명분이 없다면 논의해 볼 가치조차 없는, 매력이라곤 전혀 없는 제도다. 유신.5공시절 우리나라가 경험했던 1구2인의 중선거구제는 1, 2당의 나눠먹기식 제도란 비난을 받았었다.

90년대 중반까지 일본이 채택했던 1구 2~6인제는 파벌정치.당내 파쟁.금권정치 풍토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그래서 지금은 대만 이외에는 이 제도를 채택한 나라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하물며 전국적인 중선거구제도 아니고 농촌과 중소도시는 소선거구제, 대도시는 중선거구제라니 이렇게 일관된 원칙도 없고 정략적이기만 한 제도를 어떻게 고집할 수 있는가. 더구나 한번 주장하다 마는 것도 아니고 여야협상조차 가로막고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지역정당구도 해소문제는 전국적 비례대표제의 강화, 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병행 등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원칙없는 복합선거구제 주장은 즉각 철회하는 것이 옳다. 그런 볼썽 사나운 주장에 집착하면 주장하는 당의 이미지만 나빠진다.

다음은 우리 정치와 정당제도 개혁의 핵심과제인 정당민주화가 헛구호가 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같이 1인 보스 중심의 정당체제에서는 어느 당원도 자유롭지 못하고 보스 얼굴만 바라보게 된다. 지금도 정당들이 새 정당을 만든다, 당을 개혁한다 해서 각계의 인물들을 끌어들이고 있지만 공천권이 보스 1인의 손에 장악돼 있는 상황에서는 이들도 당지도부가 정해 놓은 규격 속의 평균인이 될 수밖에 없다.

지도자 한명만 우뚝하고 모든 조직원이 졸(卒)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 정치 만병(萬病)의 근원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상향식 공천제 등 정당 민주화의 꿈은 이미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밖에도 국민의 평등권을 유린하고 있는 과도한 선거구 인구 편차(偏差)를 시정할 의욕이 전혀 없고, 국민에게 약속했던 의원정수 축소도 유야무야되고 있는 분위기다.

단일계좌 입출금 등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높일 제도 도입은 외면하면서 정치인에게 이득이 될 선거운동국고보조 부분을 늘리는 데는 손발이 척척 맞는다.

새 천년을 맞고도 정치현실은 작은 희망과 큰 절망을 느끼게 하지만 역시 그 희망을 키우고 절망을 줄여나가는 것은 결국 선거권을 가진 우리 국민들의 몫이다.

성병욱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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