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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로 맞추자] 통일로 가는 일곱개의 징검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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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21세기에 통일은 이뤄진다.

이는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남북이 하나되어 새 천년을 일궈나갈 것이다.

분단은 우리에게 여러 제약을 안겨주었다.

전쟁의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고 경직된 사상.이념이 창의적 사고를 가로막았으며 과다한 군사비가 복지.경제발전에 장애를 초래했다.

이제 구각(舊殼)을 깨고 낡은 멍에에서 벗어나 희망찬 통일시대를 능동적으로 열어가야 한다.

통일과정과 이후의 혼란.갈등을 줄이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게 하나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서로를 감싸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고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공통분모를 늘려가야 한다.

눈앞에 펼쳐진 북녘땅의 생활고를 외면해서는 곤란하며 북의 산업부흥을 돕는 여러 형태의 경협에 나서는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중앙일보는 새 천년을 맞으면서 통일시대의 과제를 함께 생각해보는 지면을 마련한다.

◇ 북 산업부흥

남북이 체제 우위 경쟁을 벌이면서 '상대방 체질이 허약할수록 유리하다' 는 생각을 당연시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은 북한 경제의 주름살이 펴져야 통일의 부담이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장가동률 20%대' 라는 참담한 산업붕괴의 늪에서 탈출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국제사회와 한국의 협조가 필요하다.

북한은 미.일과의 관계정상화를 통해 외자.기술.원자재를 적극 끌어들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한국 기업의 투자유치에도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현대.삼성그룹이 중소기업공단.전자공단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북의 경제재건에서 한국 기업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북은 경제재건을 위해 내각의 기능과 역할을 강화하고 산업구조 개편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나진.선봉 같은 개방지역도 늘리려고 한다.

2002년 초까지의 과도기 정책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내각은 새로운 산업부흥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산업부흥 및 구조개선 노력을 지원하고 남북간에 수직.수평분업을 강화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 무기감축

새 천년을 맞이해 평화정착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동북아의 현실은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 본토에 닿는 대포동 미사일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고 탄저균 등 생물.화학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한국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에 대비해 1조여원 규모의 에이타킴스 미사일과 다연장포를 미국에서 구입하고, 차세대 전투기.대공미사일(SAM-X) 등을 확보하기 위해 1백억달러 이상을 투입할 계획이다.

남북한이 이같은 무한질주의 무기경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민족 공동번영의 기회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때문에 시급히 군비통제를 이뤄내고 군비감축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일대 정책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국방대학원 최종철(崔鍾哲)교수는 "유럽의 재래식무기감축협정(CFE)과 같은 견제장치가 필요하다" 며 "군축을 통해 남는 군사비를 경제쪽으로 돌려야 전쟁위험이 줄어들 것" 이라고 강조한다.

남북한 당국이 무기감축에 합의해 한반도의 두터운 냉전 얼음벽을 깨뜨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 이데올로기 탈피

냉전시대 청산과 함께 모스크바.베를린.프라하.부다페스트.부쿠레슈티에서는 이미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고한 지 오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역사의 시계바늘이 멈춰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98년 11월 최장집 교수의 6.25 관련 학술논문을 둘러싸고 '색깔논쟁' 이 있은데 이어 국회에서는 '빨치산' 단어를 놓고 얼굴 붉혀가며 정치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평양도 이데올로기 주술(呪術)에 포박돼 있기는 마찬가지다.

황장엽씨는 자신이 한때 평양에서 '반당적 수정주의자' 로 낙인찍혀 곤경에 처했었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가 김일성대학 총장 시절에 쓴 '사회발전의 원동력' 이란 논문 때문이란다.

주체사상의 대부(代父)가 수정주의자로 내몰릴 정도라면 평양의 이데올로기 갑옷의 두께를 짐작할 만하다.

전문가들은 남북이 이데올로기의 멍에를 벗어던질 때 비로소 통일의 활로가 트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퀴노네스 박사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최대 장애물은 상대방을 용납지 않는, 적(敵)으로 간주하는 이념적 경직성" 이라'며 "남북 모두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좀더 실용성있는 태도를 취할 때 긴장완화도 가능할 것" 이라'고 말했다.

◇ 상호이해

남북한의 통일과정에서 정치.제도적 통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회심리적 통합이다.

반세기 넘는 분단의 지속으로 남북한 주민들은 서로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고 '주파수' 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남북한 주민이 공통분모를 늘려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를 이해하는 태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 이후 줄곧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하면서 당국간 대화나 대북지원.경제협력 못지 않게 사회.문화분야의 교류협력에 주력하고 있는 것도 이런 현실인식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일부 김형기(金炯基)정책실장은 "남북 대중음악제나 농구단 교류 등 민간교류의 활성화로 서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접촉의 면을 넓혀감으로써 자연스레 '사실상의 통일상황(de facto unification)' 을 만들 수 있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의 통일이 얼마나 큰 고통과 혼란을 안겨주는지는 독일이 통일된 뒤 동.서독 출신간에 나타난 갈등에서 확인된 바 있다.

◇ 화해협력

남북은 10여년 전 기본합의서에서 화해.협력을 약속했다.

화해.협력은 당국관계만으로는 부족한 데다 그나마 늘 암초를 만난다.

그래서 민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현대의 금강산관광.서해공단사업, 삼성의 전자임가공.공단사업 등 경협이 활기를 띠고 몇몇 예술공연이 성사되는 등 문화교류가 확대되고 있지만 아직 초보단계에 불과하다.

일각에서는 "변화 조짐도, 의지도 없는 북한을 마냥 돕겠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 '거나 "대북지원이 총폭탄으로 되돌아온다" '며 화해.협력 무드에 못마땅한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반목.대결의 제로섬게임에서 벗어나는 출구가 필요하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한다.

굶주림, 생필품 부족의 늪에 빠진 북녘 동포를 돕는 과정이 화해를 촉진할 수 있고 다양한 교류.협력이 공동번영의 토대를 굳건하게 해줄 것이다.

지금부터의 과제는 '확대' 와 '제도화' 다.

화해.협력기반을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정세현 전 통일부차관은 "통일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선 접촉창구가 점-선-면으로 확대돼야 한다" 고 늘 강조한다.

경제와 문화예술분야로 국한된 교류.협력이 교육.환경.과학기술.언론 등으로 퍼져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제도화는 당국의 몫이다.

남북한 당국은 교류.협력에 나서는 민간의 노력을 북돋우고 틀을 정착시켜야 한다.

서로 이해하는데 교류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화해.협력에 참가하는 경험자가 많아져야 그 물줄기가 도도히 흐를 수 있을 것이다.

◇ 민족동일성 회복

서울에 온 탈북자들은 끝없는 차량행렬에 놀라고 각종 간판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그들에게 한자도 어렵지만 외래어는 낯선 풍경이다.

반면 평양을 방문한 남측 인사들은 전투적 용어가 넘쳐나는 정치간판에 질리고 낯선 억양과 용어 때문에 말을 알아듣는데 시간이 걸린다.

전후세대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언어접근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언어학자들은 강조한다. 남북의 언어학자들이 만나 말과 글을 다듬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이 곧 사고.행동의 차이를 줄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대북지원 활동을 펼쳐온 스티븐 린튼(유진벨재단 이사장)박사는 "이남에선 도시 정서, 이북에선 농촌 정서를 느꼈다" 고 지적한다.

북한 주민들은 서구화.근대화 체험이 없어 남한의 50~60년대식 정서를 갖고 있다.

이 차이를 극복하자면 자주 접촉하고 교류를 갖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또 남북의 새 세대가 서로의 생활문화을 이해할 수 있게 교육환경도 개선돼야 한다.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만나 함께 토의.연구하는 민족사 공유의 잔치가 필요하다" 고 강조하고, 주강현 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은 "민속 공동연구를 통해 민족공동체의 생활문화를 재창조하는 것이 동질성 회복에 유익하다" 고 지적한다.

남북이 공통점을 늘려나가는 동질성 회복이 곧 통일의 밑거름이란 지적이다.

◇ 해외교포활용

한국의 해외동포는 이미 5백만명을 넘어섰다.

동포사회는 그동안 남북의 첨예한 대결로 인해 내부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지만 분단상황을 완화하는 데 기여한 공로도 적지 않다.

통일을 능동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에서 동포사회의 응집력을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통일연구원 최춘흠(崔春欽)연구위원은 "대만이 중국과의 직교역 불허라는 자국의 공식 입장을 우회할 수 있었던 것은 동남아.홍콩.마카오 지역의 화교들이 중개역할을 담당했기 때문" 이라며 화교를 양안(兩岸)교류.협력의 성공요인으로 꼽고 있다.

특히 홍콩은 국제사회의 정보.자본.인적 네트워크.금융기지 등이 갖춰져 양안 교류를 활성화한 일등공신이라는 지적이다.

현재 남북 사이에는 홍콩과 유사한 중개지가 없다.

지역적 배경과 관련, 옌볜(延邊)지역을 본격적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지만 탈북자 문제를 둘러싼 남북한.중국의 신경전으로 인해 여의치 않다.

게다가 남북간에는 마땅한 갈등 해소방안도 정립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당국간 관계개선을 기피하고 있는 북측의 입장을 감안하면 '완충역할' 의 필요성은 절실하다.

<본사 통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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