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시평] 비역사적 드라마 '왕과 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최근 어느 회의에 갔더니 현재 방영되고 있는 '왕과 비' 라는 역사드라마가 조선시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았다.

설사 왕비들 사이에 권력 투쟁적인 요소가 있었고 그것이 사료에 약간 언급돼 있다 하더라도 그 사실만 확대 해석해 흥미 위주로만 끌고 가고 일반인들이 그것을 사실로 믿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왕과 비' 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 속에서 전개된 권력투쟁이 끝나자 왕비들간의 권력투쟁으로 극의 흐름을 무리하게 끌고 가려는 데 문제가 있다. 국왕 성종은 그녀들 사이에서 한없이 고통당하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마마보이로 묘사되고 있다.

주변에는 어디에 붙으면 유리할까 쉴새없이 저울질하는 신하들의 무리를 몇 개의 그룹으로 편가르기해 놓았는데 그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차라리 희극배우들같이 희화적이다.

인간의 삶에서 이해관계를 배제하고는 그 현상을 제대로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반대로 모든 인간행동을 이해관계로만 해석해서는 인간사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인간은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이다. 어느 시대든지 지나치게 현실론에 기울면 이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된다.

반면 이상론이 성하면 냉정한 현실론이 대두돼 그 허점을 짚어낸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사에는 항상 이상적인 명분과 현실적인 실리가 균형을 잡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전자가 자존심을 위한 장치라면 후자는 생존을 위한 본능의 소산이다. 이 양자는 한 사람 속에서도 갈등하면서 조화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결국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가 그 사람의 품격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왕비들은 권력의 화신들로, 모든 고위공무원들은 사익(私益)과 자기보신.입장강화에만 급급한 인물들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당시대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대화들을 버젓이 늘어놓고 있다.

예컨대 12월 18일 방영된 내용에는 월산대군이 동생인 성종에게 어머니인 인수대비를 묘사해 "세상을 통째로 들어 마셔도 만족하지 못할 분" 이라 하고 "어머니를 버려라" 고 권고하고 있다.

그야말로 비역사적 대목이다. 효(孝)를 최고가치로 삼은 조선시대에, 그것도 만인의 모범이 돼야 할 국왕이 그의 형과 함께 한 대화에서 어머니를 버리느니, 마느니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왕비와 대비들의 행동거지를 과장하는 것도 문제인데 등장인물 모두가 예의와 법도를 중히 여기는 궁중에서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도 않는 거친 언행을 일삼고 있다.

특히 폐비 윤씨는 표독하고 저주를 일삼는 정신병자처럼 묘사되고 있다. 물론 문제가 있어 폐비가 됐지만 인수대비의 높은 기준치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지 극중에서처럼 수준미달이었다면 왕비에 간택되지도 못했을 터다.

이 모두가 인간을 욕망의 덩어리라고 이해하는 허무주의적 인간관과 정치는 권력투쟁이라고 생각하는 단순논리에서 비롯된 오류다.

여기에 더해 상황논리가 가세하고 있다. 세상에는 나쁜 인간도 좋은 인간도 없고 오로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나 신념의 문제를 생략한 채 인간을 동물로 전제할 때 이러한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적인 해석을 동원하여 흥미본위로 자극적인 역사드라마를 계속 만들어 낸다면 우리 역사의 이해에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아무리 역사드라마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역사라는 용어를 쓰는 이상 시청자들이 사실로 믿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대와 정 반대되는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던 조선시대의 모습을 현대의 잣대로 왜곡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역사를 차용해 현대의 병적 징후들을 정당화하는 작업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가 역사에서 건질 것은 이 시대의 문제점을 비춰보는 거울로서의 순기능이다. 아울러 이 혼란의 시대를 극복하고 해체된 민족정체성을 회복하는 근거를 찾아내 희망을 가꾸어 가는 일이다.

역사드라마도 이러한 흐름에 역행해서는 존재의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일이 많은 세상에 무엇이 모자라 공영방송에서까지 우리 역사를 왜곡하면서 비역사적 역사드라마를 만드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규장각 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