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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타협의 명수가 그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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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밀턴은 사상의 시장에서 진리가 승리하게 하는 데는 어떤 정책도, 전략도, 허가도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 하느님 다음으로 강하기 때문에 진리와 거짓이 맞붙으면 언제나 진리가 승리하게 마련이다. 불후의 명저 '아레오파지티카'에서 역설한 밀턴의 이런 주장은 '자동조절의 원리'라는 개념으로 정리돼 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가정의 하나가 되었다.

밀턴의 위대한 명제(命題)에 딴죽을 걸 생각은 없지만, 그러나 그의 '진리와 거짓'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 대해서마는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어떤 주의.주장도 진리와 거짓 가운데 어느 하나라기보다 진리와 거짓의 양면을 아울러 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턴처럼 시장에 대입하여 논하자면, 사상의 시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진리와 거짓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을 거래하는 일이다. 민주주의가 잘 정착된 나라일수록 진리와 거짓은 가림의 대상이 아니라 거래의 대상이다.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답하자면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것은 그른 것이 아니다. 이전할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고, 이전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많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선과 총선에서 핵심 쟁점으로 제기되었고 국회에서 특별법까지 만든 마당에 백지화하도록 압박할 수는 없다. 남은 일은 이전의 규모와 시기를 야당이 제안한 바 있는 국회 기구에서 논의해 결정하면 된다.

지난 국회에서 '일제 강점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긴 이름의 법을 제정한 바 있다. 총선이 끝나자 여당은 조사 범위를 확대하기 위한 개정안을 만들었다. 친일 반민족 행위의 조사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불가피한 전제조건인가, 아니면 역사문제까지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사악한 음모인가? 답은 간명하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법을 도출하면 된다.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는 것은 옳은가 그른가? 이 법에는 인권침해의 소지도 엄존하지만 분단상황에서 법 자체의 폐지를 서두르는 데 부정적인 국민 정서를 간과해서도 안 된다. 현 시점에서는 여야가 이런 양면을 저울질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지금 제기되고 있는 사안은 대부분이 국회에서 토론을 거쳐 합당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인데도 정치권에서는 타협점을 찾는 일은 제쳐두고 진리와 거짓을 가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문제에 접근하는 태도를 보면 우파 근본주의자들은 골동품적 가치를 중시하는지 그 법에 손을 대는 것 자체를 금기로 여긴다. 반대로 좌파 원리주의자들은 절대적 가치에 집착해서인지 당장 법을 폐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여야에는 이른바 대사(大蛇)가 많았다. 귀로 들으면 대사(大師)나 대사(大使)를 연상하지만 우리말로 하자면 능구렁이 같은 이를 그렇게 불렀다. 여.야당의 원내총무는 대개 그런 능구렁이들이 맡았다. 그들은 때로는 당내 입지가 흔들리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의 담대함을 과시하며 대타협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들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시장은 진리와 거짓을 가리는 곳이 아니라 나의 진리와 상대의 진리를 적절하게 조화시키는 곳, 즉 거래하는 곳임을 알았던 분들이다.

요즘 정치판에서는 능구렁이를 볼 수 없다. 양당이 다 원내총무를 원내대표로 격상했지만 타협다운 타협을 이루는 것을 본 지 오래다. 능구렁이 대신에 독사들이 득실거린다. 들에 농약을 많이 뿌려 능구렁이가 다 사라졌다는데 그러자 산에서 독사들이 떼거리로 내려온 모양이다. 나는 절대선이고 상대는 절대악이다. 절대선은 절대악에 대해 시정잡배도 입에 담기 어려운 독설을 퍼붓는다. 당 내에서도 정파가 다르면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입으로는 대화와 타협, 상생을 외치지만 구두선(口頭禪)일 따름이다. 어디 정치판뿐이랴. 능구렁이가 그리워지다니 참 별스러운 세상이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언론정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