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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워싱턴, 그리고 세종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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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미국 뉴욕 맨해튼 섬의 면적은 약 60㎢다. 서울의 13분의 1이다. 그러나 세계 경제·문화에서 맨해튼이 차지하는 비중은 면적과 반비례한다. 여의도의 7배 크기밖에 안 되는 이 섬이 세계 경제·문화의 메카가 된 비결은 무엇일까. 맨해튼을 한나절만 걸어보면 답은 절로 나온다. 마치 반도체 칩처럼 필요한 모든 요소가 초고층 빌딩 숲 속에 촘촘히 박혀 있다는 게 경쟁력의 원천이다. 그 안에서 각양각색의 인재가 매일 레스토랑·극장·클럽을 돌며 어울린다. 각자의 영역을 뛰어넘는 통섭의 아이디어가 잉태하고 탄탄한 인맥이 형성되는 건 물론이다. 모든 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으니 의사결정과 실행도 빠를 수밖에 없다.

미국 수도 워싱턴의 도로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마차바퀴처럼 방사형으로 뻗어 있다. 하나는 의사당이고 다른 하나는 백악관이다. 두 축을 잇는 매사추세츠가엔 300여 개의 ‘싱크탱크(Think Tank)’가 모여 있다. 서로 견제해야 할 의회와 정부 사이에 싱크탱크라는 쿠션이 끼어 있는 형국이다. 이곳에선 매일 수십 건의 세미나가 열린다. 싱크탱크 석학은 물론 정부관리와 여야 의원이 만나 다양한 이슈를 놓고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민감한 정치이슈도 여기서 먼저 이론적으로 걸러진다. 의회정치가 미국에서 뿌리를 내린 것도 워싱턴의 이런 정치구조 덕이 아닐까.

뉴욕·워싱턴을 볼 때마다 요즘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종시 논란이 걱정스러워진다. 세종시와 여의도 국회의사당·청와대를 왔다 갔다 하느라 차 안에서 허송세월 할 공무원을 염려해서가 아니다. 서울의 정부부처를 세종시로 옮기는 건 이미 우리끼리의 문제가 아니라서다. 서울의 코앞엔 베이징·상하이·홍콩·싱가포르가 포진해 있다. 뒤통수는 도쿄가 노리고 있다. 우리가 가진 역량을 서울에 몽땅 집약시켜도 하나같이 버거운 상대다. 이 틈바구니에서 서울이 살아남자면 맨해튼·워싱턴처럼 필요한 걸 한곳에 모아도 부족하다.

서울의 기능을 쪼개서 충청도가 살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신기루다. 경제부처가 다 몰려 있는 과천에 둥지를 튼 대기업 본사는 딱 한 곳뿐이다. 정부대전청사 근처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관청을 좇아 세종시로 옮겨갈 기업이 얼마나 될까. 정부가 윽박지른다면 공기업 몇 곳은 따라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국내에선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도시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지금 같은 식이라면 서울도 충청도 다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국민과의 약속은 중요하다. 수차례 선거에서 대통령과 여당이 세종시 원안 건설을 약속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과의 약속이 자칫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결과를 낳는다면 이는 국민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걸 바로잡는 일 역시 정치의 몫이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국회와 정치권부터 서울을 떠나 세종시로 옮겨가는 솔선수범이라도 보이는 게 어떨까. 최소한 서로 움직이는 데 필요한 시간이라도 절약할 수 있게 말이다.

정경민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