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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읽기]강은교 시집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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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이 시집을 덮으면서 우선 고개가 갸웃거려졌던 것은 이렇게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시집도 참으로 드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집을 통틀어 구체적인 인간의 형상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란 아파트 경비원 김씨와 어릴 때 집에서 일하던 '색시' 라는 이름의 여자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의 시의 주인공은 대부분 사물들이다. 사람 대신에 등불 하나가 걸어오고, 빗방울 하나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또는 은행잎 한 장이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그를 불러세운다. 이렇게 사물들은 불현듯, 그리고 도처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고 말을 걸어온다. 그러면 작은 빗방울 하나에도 그의 몸과 집은 "휘청-한다" .

이렇게 사물들이 특유의 자력(磁力)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것은 이번 시집만의 특징은 아니다. 강은교의 시에서 자연이나 사물은 비유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 자체가 독자적인 실존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가히 '강은교적' 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그 힘을 발산한다. 일찍이 '연도' (煉禱)라는 초기시에서 "눈물 하나가 바다를 일으킨다" 고 노래한 바 있듯이, 그의 시에서 눈물 한 방울은 바다 전체와 맞먹는다.

또한 모래 한 알은 사막 전체와 맞먹는다. 그러므로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에 수시로 등장하는 '하나' 라는 수사는 단순한 수량을 나타내기보다는 그 각각이 온전한 하나의 개체임을 선언하는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 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외롭게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내밀하게 소통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시인은 "언제 두 어둠이 한데 마주 보며 앉을까" (시 '한 어둠은' 중)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랜 기다림 속에서 그는 '어둠의 귀' 를 갖게된 것일까, "하두 오래 어둠을 만지고 앉아 있었더니 어둠이 내 살 같아졌군요" (시 '세 여자' 중)라고 말하는 걸 보니. 그가 지닌 어둠의 귀는 그 가청범위가 일반적인 귀와 사뭇 다르다.

그의 눈과 귀에 포착되는 것들은 한결같이 너무 작거나 너무 짧거나 너무 멀거나 너무 희미한 것들이다. 예컨대 엘리베이터 속에 묻어온 꽃잎 한 장, 어둠 속에 무릎 꿇고 있는 종소리, 23층의 창틀에 안개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있는 파리 한 마리, 바닷가 모래들의 숨소리 같은 것들이다.

그의 시 속에서 이 사물들은 마음의 어둠이 스스로를 밝히려고 가까스로 지펴낸 등불과도 같이 위태롭게 깜박거리고 있다. 어둠을 밝히며 "내 속으로 걸어들어와/환한 산 하나가" (시 '등불과 바람' 중)되는 등불 하나. 그 불빛에 힘입어 사물들은 인간적인 깊이와 온기를 오롯하게 지니게 된다. 그러니 서로 몸 부비는 이 사물들의 빛과 그림자 속에 어찌 인간이 깃들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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