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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42. 젊은 출판기획자 집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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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도대체 이런 책을 내면 팔리겠냐. " 한 선배가 말을 건넨다.

후배가 토해낸다.

"팔리는 책 만들려고 이 판에 들어선 것 아닙니다. 현실에 뿌리를 둔 뭔가 의미 있는 책을 내보고 싶은 거죠. 그건 팔리는 것하고 별개의 문제 아닌가요. "

추운 바람이 유난하던 12월의 한 저녁 인사동 술집 한 켠에서 젊은 편집자들이 모여 나누는 대화는 30대의 젊은 혈기가 아직 식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말은 팔리는 책을 내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의미 있는 책' 이란 말에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 또 이런 것도 있다.

"대학 때 글은 사회변혁의 수단이었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출판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책을 직접 만들면서 독자와의 만남이란 걸 알게 됐어요. 책이 변화의 힘이라고 생각 했는데 책이라는 게 상품이란 것을 알게 된거죠. "

80년대 대학을 다녔고 90년 초반부터 출판 기획의 주축으로 떠오른 젊은 출판 기획자 집단. 출판 386세대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은 대학시절 이미 좌절과 아픔을 겪은 세대로 광주의 뼈아픈 기억 속에서 군사정권을 맞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소련의 붕괴를 지켜보았던 이들이다.

윗세대에 비해 보수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다는 점, 특히 유연한 아카데미즘을 가진 집단인 이들은 실제로 사회 현실에 강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상업화라는 두 마리 토끼몰이를 하고 있는 '지식 대중화' 의 주역이라 할 수 있다.

김학원(37.서강대 국문과 81) 푸른숲 주간.윤철호(서울대 철학과 80) 사회평론 대표.최봉수(서울대 국문과 81) 중앙M&B 편집위원.정은숙(이화여대 정외과 81) 열림원 주간 등은 이런 흐름을 주도해 가는 출판계 인물들.

85년 출판계에 뛰어든 열림원의 정주간을 제외한 이들은 90년 초 출판 입문자로 각자 시국사건으로 감옥살이를 경험했거나 위장취업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들이기도 하다.

이는 80년대 암울했던 사회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92년 푸른숲에 입사하기 전 반정부 시국사건.위장취업 등으로 세 차례나 옥살이를 한 김학원 주간은 '출판계의 마이다스 손' 으로 불린다.

특히 출판에서는 낯설었던 마케팅 개념을 구체화시켰고 참신한 기획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 예로 지난해 인문서로 분류되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을 손에 잡힐 듯한 크기의 판형으로 바꿔 6만 부를 판매하는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화제작 잭켄필드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 아서 니호프의 '사람의 역사' 등도 그의 손을 거쳤다.

최근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정찬용의 '영어공부 절대로 하지마라' 로 주목받고 있는 윤철호 대표는 91년 시사성이 짙은 사회평론에 입사, 잡지를 만들다 94년 이후 단행본에 주력하고 있다.

역시 재학시절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할 정도로 사회개혁에 열을 올렸던 그가 "책에 이념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독자에게 어떻게 다가가는가가 중요하다" 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시대 변화의 체취가 묻어난다.

이케하라 마모루의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 , 서갑숙의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등 올해 최대 베스트셀러를 잇달아 쏟아낸 중앙M&B의 브레인격인 최봉수 위원 역시 노동운동의 이력이 있는 편집기획자. 그는 출판 기획에서 마케팅까지 출판현장의 실제 모습을 소개한 '출판기획의 테크닉' 을 써냈는가 하면 현재 하이텔.유니텔 등에서 출판컨설팅 IP사업까지 하고 있다.

386세대 중 가장 오랜 출판 경력을 갖고 있는 정은숙 주간은 문학과 대중성을 연결시키는 독특한 감각을 지녔다.

류시화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시인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등에서 보듯 문학성 짙은 소재를 친근한 모양으로 포장해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어냈다.

문학계의 인맥이 넓다는 평을 듣는 그는 '나만의 것' (민음사)등 두 권의 시집을 내기도 했다.

80년대 초 학번을 넘어가면 참신한 기획으로 주목받는 편집자가 눈에 띈다.

불과 출판계에 들어온지 5년 미만인 김인호(고려대 철학과 84)바다출판사 사장과 문현숙(연세대 정외과 84)이산 기획실장이 그들.

전 국언론노종조합연맹의 '언론노보' 기자로 일하다 96년 출판사를 낸 김사장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로 이름이 알려졌다.

처음부터 눈에 띄는 문화비판 원고는 아니였지만 필자와 함께 치밀한 기획에 들어가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과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등의 책이 잇달아 선보여 소위 '산다 신드롬' 을 일으키고 있다.

김사장이 기획력으로 베스트셀러를 냈다면 차분하고 깊이 있는 책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이가 문현숙 실장이다.

서울 신촌에서 '□' 서점을 운영하다 남편과 함께 97년부터 이산출판사를 연 문실장은 동아시아 학술 분야의 책만 집중적으로 내고 있다.

대표작이 조너선 스펜서의 '천안문' '중국을 찾아서' ,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등. 깔끔한 표지 디자인과 편집으로 책을 사고 싶다는 마음을 절로 생기게 만든다.

그럼에도 여태 5천 부 이상을 팔린 책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면 출판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젊은 편집자들이 타성에 젖지 않고 전문성을 키워나가기 위해 그룹별 소모임의 갖고 있는 것도 특징. 대표적인 것이 서울편집인클럽과 한국여성편집자클럽이다.

현직 교사가 교육이 없어진 학교현장을 고발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학교종이 땡땡땡' 을 만든 맹한승(한양대 국문과 83)미래M&B 기획부장을 비롯, '송병락 교수의 경제학 시리즈' 를 기획한 안희곤(연세대 철학과 83)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편집장, '김지하의 사상기행' 을 편집한 이순화(동덕여대 가정교육과 82)편집장 등은 서울편집인클럽 소속의 편집자들다.

이들은 매달 정기모임을 갖고 '출판 흐름 읽기' '출판기획사례연구' 등에 대해 토의한다.

강맑실 사계절 대표.형난옥 현암사 주간 등 국내 대표적인 여성출판인들이 거쳐간 한국여성편집자클럽에는 윤양미(동국대 국문과 83)역사비평사 단행본팀장. 황성혜(연세대 국문과 83)웅진출판 개발3팀장.박정하(서울시립대 영문과 86)문예출판사 편집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매달 한 차례 짬을 내 '마케팅' '출판 문화' 등의 주제를 놓고 세미나를 하고 있다.

80 년대 중.후반 학번으로 넘어오면 책 편집뿐 아니라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고 있는 편집자들이 눈에 띈다.

93년 민음사에 입사, 그 기획력을 인정받으면서 현재 자회사인 사이언스 북스와 황금가지 두 곳의 편집장을 맡고 있는 장은수(서울대 국문과 86)씨는 93년 '상상' 에서 데뷔한 문학평론가.

해냄 편집장 정해종(추계예대 문창과 85)씨 역시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 등을 낸 시인이다.

또 문학과 지성사 윤병무(대전대 영문과 86)편집과장은 대중음악평론가 성기완.소장 철학자 김재인씨 등과 함께 '이다' 동인으로 활동하며 인문학과 대중문화의 새로운 결합을 시도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90년대 출판기획이 80년대 '무엇을 만들까' 란 주제에서 '어떻게 만들까' 란 것으로 진일보한 지금 다양한 매체가 더욱 기승을 부릴 다음 세기에는 또 어떤 화두를 던져야 할지 젊은 출판 기획자들은 고민에 빠져있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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