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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부인 로더미어 … 이정선 … 마이코 인생도 사랑도 자원봉사도 다국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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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로더미어 자작 부인(왼쪽에서 둘째)이 올 9월 개인비서 멜리사 리(왼쪽에서 셋째)와 전남 고흥군 소록도의 한센인 시설에서 환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로더미어 자작 부인 제공]

재일동포 로더미어 자작 부인(60). 한국 이름은 이정선이다.

전남 고흥에 있는 한센인 시설 국립소록도병원의 후원자 중엔 영국 귀족인 로더미어(60) 자작 부인이란 인물이 있다(자작 부인(viscountess)은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으로 이뤄진 귀족 작위의 하나인 자작의 부인에게 부여하는 존칭). 그는 재일동포 2세다. 한국 이름은 이정선. 마이코라는 일본 이름도 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미국 뉴욕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다 영국인 비어 함스워스 로더미어 자작을 만나 결혼했다.

로더미어 자작 부인은 아프리카 케냐와 동남아 동티모르 등지에서 구호·봉사·문화 나눔 활동을 펼쳐왔다. 그런 그가 활동 무대를 한국으로 넓히고 있다. 특히 소록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우선 내년 5월 5일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소록도 우촌복지관 공연을 주선했다. 이 오케스트라의 후원회장이 그다. 아버지 고향인 전남 함평의 보육원인 시온원도 후원하고 있다. 그는 올해 들어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디 R 재단’도 설립, 국제적인 나눔 봉사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다.

로더미어 자작 부인은 영국 상류층과 친분이 두텁다. 찰스 왕세자가 이끄는 자선협회 회원이며, 토니 블레어 전 총리와는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깝다. 이런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한국 문화를 영국에 알리는 데도 힘쓰고 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한국인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협연도 주선했다.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9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최근 서울을 찾은 그를 만나 자선활동에 나선 사연과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어봤다. 그는 한국어도 서투르고 한국에 산 적도 없지만 “한국은 나의 조국”이며 “한국은 나의 피와 뼈, 나아가 모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젊어서 뉴욕행을 결심한 이유는 뭡니까.

“1970년에 오사카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려 전시관에서 일했어요. 그때 넓은 세계를 봤습니다. 외국에 나가서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결심을 하고 뉴욕으로 갔습니다. 갤러리에서 일하면서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손 모델을 생각했어요. 손이 예쁘단 얘길 많이 들었었거든요. 그래서 포드 모델 에이전시를 찾아갔고, 채용이 됐지요. 크리스찬 디올, 레브론과 같은 유명 브랜드의 모델도 많이 했지요. 에이전시에선 손 하나당 100만 달러 보험을 들어줄 정도였습니다. 5년쯤 한 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전직하려고 준비하다가 남편을 만난 거예요.”

-남편인 로더미어 자작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뉴욕의 한 지인이 동물병원 후원 기금 마련 행사를 열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어요. 그를 본 첫 순간 알았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위해 보내주신 운명적인 사람이라고요. 남편은 한국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어요. 저에게 ‘지금 할아버지 서재인데 한국에 대한 모든 책을 다 찾아보고 있다’고 전화를 한 적도 있고, 빈대떡이며 멸치볶음과 같은 한국 음식도 좋아했고요.”

-귀족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은 어땠나요.

“93년 결혼식을 올린 뒤 집안 사람과 주변 분들이 다들 따뜻이 맞아줬습니다. 국제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진 분들이어서인지 환대해 주고 존중해 주었어요. 시어머니도 아주 잘 대해 주셨지요. 한국에선 어른을 공경하니 한국 가서 살아야겠다고 농담도 하시곤 했어요. 결혼생활은 참 행복했습니다. 남편은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98년 친어머니도 잃고, 남편도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요.

1985년 프랑스 파리에서 남편 로더미어 자작(오른쪽)의 생일날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

“참 이상하지요. 남편은 그날 저와 함께 프랑스에 있다가 영국에 일이 생겨 혼자 가봐야 했는데, 마음이 왠지 너무 무거운 거예요. 원래 공항까지 따라 나서지 않는데 그날은 예외였어요. 비행기 트랩에 오르려는 그를 꼭 안으면서 ‘내게 아름다운 인생을 선물해주어 고마워요’라고 얘기했지요. 평소엔 남들 보는 눈도 있고 부끄러워서라도 그러지 않았을 텐데요. 남편도 제게 ‘나의 사랑하는 사람, 당신이 너무 그리울 거요’라고 했지요. 그렇게 그가 떠난 몇 시간 뒤 그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유언에 유골의 반은 제가 있을 곳에 묻어 달라고 되어 있기에 전북 무주의 백련사에 안장했어요. 저의 어머니도 안장된 곳이고, 저도 나중에 함께할 곳입니다.”

-그러다 자선사업으로 제2의 인생을 열었습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고통을 겪다 항상 하고 싶었던 자선사업을 시작하면서 기운을 얻고 있습니다. 영국의 귀족 부인으로 최상류층 생활을 누린 만큼 힘없는 분들을 돕는 게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싶어 케냐와 동티모르 등에서 봉사활동을 했어요. 한국에서도 앞으로 집중적으로 할 생각으로 재단(레이디 R 재단)을 만든 것이지요. 재단은 저의 자식과 같습니다. 나의 나라인 한국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싶어요.”

-소록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뭡니까.

“17년 전 프랑스 도빌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어요. 병원에서 눈을 떠보니 창밖으로 성당이 보이고 성녀 테레사 조각상이 있더군요. 성녀 테레사가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성당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어느 날 런던의 한 성당에서 벨기에 출신 다미앵 신부에 관한 책을 접하고 그분에게 매료됐어요. 벨기에 출신으로 하와이 한센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다 한센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입니다. 당시 토니(블레어 전 총리)가 정치적으로 힘든 때였는데 ‘토니, 이 책 읽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라고 보내주기도 했지요. 과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소록도를 방문하는 것을 보고 감격한 것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센인에 대한 편견이 하루속히 완벽히 사라져야 합니다. 그분들이 지금껏 힘들게 살아온 세월을 잊지 말아야 해요. 최근에도 병원에 다녀왔지만 할머니들 머리 빗겨 드리고 얘기 나누는 것이 너무나 큰 기쁨이에요.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너무도 아름다운 분들입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공연을 주선했는데요.

“오랫동안 영국에서 최고 수준의 문화를 들고 와 소록도의 분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영국을 매개로 한국의 어려운 분들을 돕고 싶습니다. 실은 가수 조용필씨도 부르고 싶었어요. 병원에 계신 분들이 조용필씨 노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지금도 병원에 묵을 때면 함께 조용필씨 노래를 부르곤 한답니다. 조용필씨도 한번 모시고 싶습니다.”

  전수진 기자



‘데일리 메일’ 판형 변화 주도
신문사 부흥시킨 언론 사주

남편 로더미어 자작은

로더미어 자작 부인의 남편인 비어 함스워스 로더미어(1925~98) 자작은 영국의 세습 귀족이자 언론계의 내로라하는 거물이었다. 3대 로더미어 자작인 비어는 78년 부친인 2대 로더미어 자작이 작고한 뒤 작위를 물려받았다. 98년 3대 로더미어 자작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인 조너선이 4대 로더미어 자작으로 작위를 계승했다. 조너선은 비어 함스워스 로더미어 자작이 첫 번째 부인인 패트리샤 브룩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로더미어 자작 가문은 영국 유력 일간지 데일리 메일과 일요신문인 ‘메일 온 선데이’를 비롯한 여러 매체를 발행하는 거대 언론사 어소시에이티드 뉴스페이퍼스를 소유하고 있는 미디어 명문가다. 3대 로더미어 자작은 언론사 경영권을 71년 아버지로부터 넘겨받았다. 그는 중산층을 겨냥한 일대 지면혁신을 단행해 경영난에 시달리던 데일리 메일을 부흥시킨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82년 메일 온 선데이 창간도 그가 주도했다. 뉴욕 타임스는 98년 3대 로더미어 자작의 부음 기사에서 “데일리 메일의 판형을 대판에서 타블로이드로 바꾸어 대담한 혁신을 단행한 언론계의 거물”이라고 소개했다. 98년 3대 로더미어 자작의 장례식엔 토니 블레어 당시 영국 총리와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 등 각계 거물들이 대거 참석해 애도했다.

BBC방송 인터넷판은 블레어 당시 총리가 자작 부인과 악수하며 위로하는 사진도 보도했다. 당시 머독 회장은 “로더미어 자작은 경쟁자이자 좋은 친구였으며 언론계의 존경을 받았다”고 애도를 표했다고 BBC는 전했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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