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어린이 놀이터가 된 골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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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2일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춘천CC엔 하루 종일 1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PGA투어가 열린 것도 아닌데 웬 갤러리? 갤러리가 아니라 무료 개방일을 맞아 봄나들이 나온 춘천 시내 학생들과 노인.주부들이다.

골프장 48만 평은 올봄 새로 돋아난 파란 잔디로 싱그럽다. 만개한 핏빛 연산홍을 비롯해 철쭉.꽃잔디 등 각종 꽃이 맵시를 다툰다. 물레방아 도는 연못과 시원스레 뿜어대는 분수. 신록의 숲속에선 토끼와 다람쥐가 숨바꼭질한다. 어른들은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젊은이들은 디카를 눌러대기 바쁘고, 어린이들은 너른 잔디밭을 이리저리 뒹굴며 뛰는 자체만으로도 즐겁다. 편평한 페어웨이는 잔디구장으로, 언덕진 페어웨이는 잔디썰매장으로, 모래 벙커는 씨름장으로 둔갑했다. 지체장애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에게 푹신한 골프장 잔디밭이야말로 최상의 놀이 마당이다. 자빠지고 넘어져도 '까르르'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유치원과 초.중학교 학생만 8000명이었다니 어지간히 복잡했겠구나 싶지만 그래봐야 골프장 27홀 중 입구에 가까운 10개 홀만 아이들이 차지했다. 나머지 홀은 텅텅 빈 채 몇몇 어른만 한가롭게 산책을 즐겼다. 이날 하루 이 골프장은 골프 치는 곳이 아니라 어린이 놀이터요, 유원지였다.

우리나라 골프장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정갈하다. 수려한 조경수가 즐비하고 아담한 연못과 인공폭포, 그것들을 조화롭게 배치한 설계도 그럴싸하다. 국내 최고로 꼽히는 안양베네스트CC의 경우 "나무 값만 1조원대"라는 소문이 날 정도다. 골프장 측은 "터무니없다"고 부인하지만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예술(?)이라 그런 계산이 나올 법도 하다. 골프장들이 인공으로 조성됐다는 점에서 환경파괴적 요소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처럼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진다면 그건 국토 가꾸기라는 순기능으로 봐줄 만하다. 이런 장소가 전국 곳곳에 훨씬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문제는 이렇게 좋은 장소를 대다수의 사람은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골프인구가 많이 늘었다고 하지만 골프는 여전히 호화 사치 운동에 속한다. 회원권이 아파트값과 맞먹고 그린피도 상당히 비싼 편이다. 지난해 전국 190여 골프장을 찾은 내장객 수는 연인원 1617만 명. 이 중 상당수가 주 1~2회 라운딩을 즐기는 매니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골프장을 찾은 사람은 훨씬 줄어든다. 100만 명쯤 될까. 대부분의 서민에게 골프장은 '가진 자들의 성채'다.

정원 같은 예쁜 골프장. 소수의 사람만이 즐기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다. 일반인도 가끔 활용할 수 있다면 골프장으로만 기능하는 것보다 몇 배, 몇십 배 훌륭한 사회적 자산이 될 텐데. 어린이 놀이마당이나 시민의 휴식공간에서부터 각종 공연장.행사장 등 쓰임새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골프는 못 치지만 입장료를 내고라도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걷고 싶다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가뜩이나 골프장이 부족해 부킹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다른 용도로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항변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위화감을 줄이자는 차원에서도 한 번쯤 고려해 봄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골프장 측에 일방적으로 개방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공산당식 발상이다. 막대한 투자액과 관리비용, 비싼 그린피 등을 감안하면 현재와 같은 폐쇄적 운영이 당연하다. 춘천CC처럼 자발적 의사가 아니면 안 된다. 이 골프장은 "그림 같은 경관을 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행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올해로 일곱 번째. 처음엔 잔디 훼손이 걱정됐지만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단다. 학생들이 뒷청소도 깨끗이 해 바로 다음날엔 정상적으로 개장했다.

골프장의 잔디밭은 특히 어린이들에겐 어느 곳과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놀이마당이다. 우선 1년에 한두 차례라도 어린이에게 개방하는 방안부터 연구해 보면 어떨까. 어제 어린이날 공원마다 몰린 인파를 돌아보자. 이리 밀리고 저리 부딪치고. 어린이날인지, 어린이 고생하는 날인지. 골프장과 골퍼들이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할 장면이다. 시멘트 숲에 갇혀 지내는 우리 아이들에게 탁 트인 잔디정원을 선물한다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비(非) 골퍼의 날'을 운영하는 골프장에 세금을 감면해 준다든지, 골프장 측과 정부.지자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 봅시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