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선진적 노사관계 확립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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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0세기는 자본과 노동이 힘으로 맞서는 갈등의 세기였다.

1848년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제창하고 뒤이어 레닌주의가 등장하자 노동운동은 혁명노선을 추구했고, 노사관계는 억압과 저항의 악순환을 거듭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과 1959년의 쿠바혁명 등은 노사갈등의 정치적 파생물이며 자본주의 역사가 그만큼 험난했음을 방증한다.

한국도 건국기의 좌우갈등을 비롯해 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노사갈등을 격렬하게 겪어야 했다.

70년의 전태일 분신사건과 87~88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20세기 한국의 노사관계가 대립적이었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같은 대립관계의 만성적인 악순환은 우리 사회의 큰 문제로 자리잡았다.

세계무역기구(WTO)체제에 대비해 노사관계도 경쟁개념을 도입해야 했지만 이 점을 간과하고 소모적인 대결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우루과이라운드로 시장의 빗장이 풀리자 한국경제가 적응력을 잃고 힘없이 주저앉았던 것이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의하면 95년도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은 26위였으나, 99년에는 세계 47개국 중 38위로 그 순위가 해마다 떨어졌다.

게다가 인적자원 경쟁력은 31위, 노사관계 경쟁력은 46위로 끝에서 두번째다.

경제환란의 한 가지 원인이 노사관계의 후진성에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이 점을 고치지 않고는 21세기 국제경쟁에서 생존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노사관계의 경쟁성을 높이려면 노사정이 노사정위원회에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합의제도를 정착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문화가 성숙해야 한다.

유럽의 경우 수백여년에 걸친 시민사회의 전통 속에서 이 제도를 정착시킬 수 있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실험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노사(勞使).노정(勞政)간 뿌리 깊은 불신과 자기중심적 배타성이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의 노사관계 모형이 노사정위원회의 출현을 계기로 대변혁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뢰의 빈곤에 따른 한계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노사민주주의를 관행적으로 정착시키기엔 시행착오가 불가피할 것이다.

우리가 정녕코 경제환란의 재발을 막고 21세기의 승자가 되고자 한다면 서둘러 노사관계 패러다임을 협력위주로 바꿔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약속과 합의는 지켜야 하고, 집단이기주의를 넘어 공동이익에 무게중심을 두는 윈윈전략을 추구해 나가야 할 것이다.

80년대 구조조정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네덜란드.이탈리아.미국 등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예컨대 일본경제의 도약에 위협을 느낀 80년대 미국 기업들은 경영혁신을 위해 노사가 손을 잡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이 90년대 경쟁력 회복의 기초가 됐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화와 세계화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대세고, 지식기반사회로의 진입이 확실시되는 21세기에는 노사관계도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고 지식경쟁력을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경제환란의 고통을 겪고서도 대립적 노사관계를 탈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김호진(金浩鎭)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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