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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 '세기말' 네가지 에피소드 통해 천민적 우리 사회 조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11일 개봉될 영화 '세기말' 은 97년 데뷔작 '넘버 3' 에서 특유의 폭력과 욕설로 3류 인생을 풍자해 주목받은 송능한(40)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세기말' 은 제목처럼 1999년 한국의 풍경이다.

그것은 음울하고 무겁고, 웃기면서도 슬프다.

꿈과 현실이 어긋나 생겨난 틈새, 그 안으로 뒤틀리고 일그러진 사회에서 가쁘게 숨 쉬는 사람들의 모습을 일종의 세밀화처럼 그리고, 그것을 이어 '벽화' 처럼 구성했다.

시사회에서 사람들은 이 '먹물 코미디' 의 벽화를 보며 자지러졌다.

벽화에는 한 개인의 힘으론 제어되지 않는 거대한 사회시스템에 대한 분노, 저항할 힘도 없는 절망, 그러면서도 끝내 버릴 수 없는 희망이 내일을 향한 표지처럼 서있다.

영화는 소수의 주인공이 극 전편을 이끌고가는 기승전결 구성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에 '모라토리엄' (지급불능상태) '무도덕' '모럴 헤저드' (도덕적 해이) 그리고 'Y2K' 등 모두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나누어 10여 명의 일상을 좇는다.

멜로 영화라면 스스로 '닭살 돋는' 거부감에 시달리면서도 동화같은 멜로 드라마를 쓰려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시나리오 작가(김갑수), '원조교제' 로 서로 돈과 몸을 교환하는 50대의 자본가 (이호재)와 21세 여대생(이재은), 냉소적으로 기성세대인 '애비들' 을 비난하지만 정작 자신은 도덕적으로 무감한 삶에 탐닉하는 대학 강사(차승원)….

한 편의 영화에서 이들은 아는 듯 모르는 듯 계단에서 혹은 거리에서 어깨를 스치고 지나면서도 같은 시공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관계 맺는 '동시대인' 의 군상을 이룬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총알택시 안에서 안전띠를 움켜쥐고 있는 일 밖에는 할 수 없는 주인공의 모습, 혹은 꿈을 허락하지 않는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결국 쓰레기 더미에서 약물이 주는 환상에 빠져드는 또 다른 주인공의 모습은 씁쓸한 이 시대의 풍경에 다름 아니다.

감독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넘버3' 같은, 즉 삼류 사회시스템에 대해 느꼈던 분노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시나리오 작가인 두섭이 영화평론가들을 향해 "당신은 네 마누라한테도 별을 매기나□ 얼굴은 별 두 개, 가슴은 별 두 개 반… 당신을 보면 영화를 밥그릇으로 여기는게 보여" 라고 일침을 놓고 대학 강사인 상우는 "나라를 망친 새끼들도 먹물, 뇌물 주는 새끼도, 그걸 받아 처먹는 새끼도 먹물, 그걸 씹고 있는 새끼들도 먹물" 이라며 교수 임용 자리를 따내려 자신이 마련했던 술자리를 뒤집어엎는다.

강의실에서 "아버지…XXX, 넌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라는 이성복의 시구를 그럴 듯 하게 인용하는 그는 그러나 그 '애비들' 의 모습을 극복하지 못하고 '도덕적 해이' 의 상태에 빠져 있다.

송감독이 '넘버 3' 에서 특유의 욕설로 보여준 우리 사회의 '천민성' 에 대한 조롱은 이번 영화에서도 전편을 관통하는 주제다.

'넘버 3' 와 다른 점은 희화성을 약간 덜어내는 대신 그자리를 직설적인 까발리기로 채웠다는 것이다.

'넘버3' 에서 송광호가 무지막지하게 고집한 현정화가 임춘애로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쓴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향해 거침없이 퍼부어지는 대사들이 바로 그같은 방식으로 이 영화를 대변한다.

재치를 넘어서 통쾌함까지 선사하는 독설은 재미와 풍자의 힘을 더해 직접적 카타르시스까지 제공하는 것이다.

Note: '세기말' 은 등장인물들의 1년 후 모습을 조망한 'Y2K' 에서 인터뷰 형식을 도입했다.

관습을 탈피한 '낯선 형식' 을 고집한 감독의 노력. 관객들은 어떻게 볼까.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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