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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상징 장충단, 일제시대에 갖은 수모 당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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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일제 강점기의 장충단공원. 일제는 장충단이라는 이름은 유지하되, 주변에 집창촌을 설치하는 등 이름에 깃든 항일의 의미에 모욕을 가했다(『사진으로 본 서울의 어제와 오늘』).

국립서울현충원은 대통령 당선인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자, 공식적인 국빈 방문 일정에 빠지지 않는 곳이다. 순국자의 유해나 위패를 안치한 장소는 근대 국가의 대표적인 성역이다. 순국자는 나라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한다는 국민 국가의 이념을 실천한 사람들로서, 온 국민이 경모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1900년 10월 27일, 고종은 원수부에 명하여 을미사변 때 순국한 장병들을 제사 지내는 단을 따로 마련하도록 했다. 원수부는 남소영 자리에 단을 설치했고, 고종은 충성을 장려한다는 뜻에서 ‘장충단’이라 이름 지었다. 이듬해부터 다른 사건들로 순국한 사람들의 위패도 함께 봉안했다.

장충단은 순국자를 위한 대한제국의 공식 제단으로서 현재의 국립현충원과 같은 위상을 지녔다. 또 개항 이후 순국은 항상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일어났기에, 장충단은 저절로 항일의 상징이 되었다. 장충단을 남소영에 설치한 것도 이곳이 남산 기슭에서 동쪽으로 뻗어가던 일본인 거류지를 가로막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장충단을 곱게 볼 리 없었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일본 거류민단은 장충단 바로 서쪽에 유곽을 설치했다. 일본은 이어 장충단에 대한 제사를 폐지시켰고, 1919년에는 그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1932년에는 장충단 동편에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지어 올렸다. 대한제국의 성소이자 항일의 상징이었던 장소를 철저히 모욕하고 흔적을 지운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수립 직후 장충단공원 안에 전몰장병의 위패를 봉안하는 장충사를 두어 위상을 잠시 회복시켰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동작동에 국군묘지가 설치됨으로써 장충단은 공원으로 되돌아갔다. 국군묘지는 1965년 국립묘지로 바뀌었다가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다시 개칭됐다.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현충원에서 이장하라는 보수단체의 시위가 있었다. 지금 형편으로 보아서는 이런 일이 재현되지 말란 법도 없다. 현충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명칭과 내용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 탓이다. 왕이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든 국가 수반에 대해서는 현부(賢否)를 따질 뿐 충역(忠逆)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다. 아예 국가수반 묘역을 따로 조성하고 기록관을 병설하여 현대판 종묘를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당대에는 경계가 될 것이요, 후대에는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을 남겨주는 일이 될 테니 말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