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조세림 '실춘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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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불미꼴 골안에 뻐꾸기 애끊게 울어

앞개울 버들개지 무료한 하루해도 깊었다.

허기진 어린애들 양지쪽에 누워 하늘만 거니

휘늘어진 버들개지 물오름도 부질 없어라.

땅에 붙은 보리싹 자라기도 전 단지밑 긁는 살림살이

풀뿌리 나무껍질을 젖줄 삼아 부황난 얼굴들이여

옆집 복순이는 7백냥에 몸을 팔아 분 넘친 자동차를 타더니

아랫마을 장손네는 머나먼 북쪽길 서글픈 쪽박을 차고

어제는 수동할머니 굶어 죽은 송장이 사람을 울리더니

오늘은 마름집 곳간에 도적이 들었다는 소문이 돈다.

- 조세림(趙世林.1917~1937) '실춘보(失春譜)'

스무살에 시를 썼고 스물한살에 죽었으니 누가 그를 알기나 하랴. 그의 벗 오일도가 1주기를 맞아 자신의 시집은 없으면서도 죽은 벗의 시집을 내주었으니 그것이 '세림(世林)시집' 이었다.

1938년의 일이다. 조지훈의 맏형이니 그 집안에서 형제 시인이 나온 것이다. 하필 치통으로 이를 뺀 직후 서울에서 사람이 찾아오자 마신 술이 독이 됐던 것이다. '실춘보' 는 30년대 후반 식민지 현실이 충실하게 그려져 있다. 리얼리즘시의 가능성이었다. 봄도 봄이 아닌 현실, 봄을 잃어버린 현실이 준열하다. 조세림! 그의 이름을 이제부터 잊지 않는다.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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