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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위에 사람, 조범현 ‘포수 리더십’이 이겼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KIA의 나지완(왼쪽에서 둘째)이 9회말 1사 후 끝내기 홈런을 친 뒤 1루를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 동료들도 나지완을 따라 달리며 환호했다. [연합뉴스]

‘광주 호랑이’가 부활했다.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가 3년차 외야수 나지완의 극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3년 연속 우승에 도전한 SK를 물리치고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KIA는 24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09프로야구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5-5로 맞선 9회 말 1사 후 터진 나지완의 홈런 한 방으로 SK에 6-5로 역전승, 4승3패로 우승했다. 1997년 이후 12년 만의 정상 복귀다.

KIA의 전신인 해태는 83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97년까지 아홉 차례나 챔피언에 올랐던 20세기 최강팀이다. 그러나 선동열(현 삼성 감독)·이종범(KIA)·임창용(일본 야쿠르트) 등 핵심 선수들을 방출하면서 전력이 약해졌다. 2001년 KIA로 간판을 바꿔 단 뒤 2005·2007년 최하위까지 떨어지는 등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KIA는 수차례 지도자를 바꾸고 FA선수들을 영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광주 왕조’의 부활은 포수 출신 지도자 조범현의 손끝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부임한 조범현 감독의 취임 일성은 “야구에서 치밀한 전략 수립, 작전 수행 능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KIA는 패배의식을 걷어 내는 것이 급하다”였다.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다. 조 감독은 그 다짐, 그 약속을 1년 만에 지켜 냈다.
 
포수의 덕목, 영리함·책임감·희생정신
어린 야구선수를 둔 미국의 아버지가 아들을 지도할 때 구입하는 책 중 하나. 『당신의 자녀에게 가르쳐 줄 101가지 야구 이야기(101 Things You Can Teach Your Kids About Baseball)』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당신이 리틀야구팀 감독이라고 하자. 가장 영리하고, 책임감과 희생심이 있는 아이를 포수로 택하라. 결정의 근거는 바로 리더십이다.”

포수는 단순히 덩치가 커서, 그래서 투수가 바라볼 타깃이 넓어서 마스크를 쓰는 선수가 아니다. 프로야구를 시청할 때마다 ‘저 포수는 덩치가 크지 않으냐’고 반문하지 마시길. 리더십이 있어 감독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아듣는 그 선수가 우연히도 체격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게 더 옳다.

KIA 조범현 감독이 우승한 뒤 SK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 인사하고 있다.[뉴시스]

올해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에 나선 팀들의 지도자도 대부분이 포수 출신이다. LA 에인절스의 마이크 소시아, 뉴욕 양키스의 조 지라디, LA 다저스의 조 토레 감독이 그들이다. 2009년 30개 팀 감독 중 13명이 포수 출신. 전체 3분의 1이 넘는다.

플로리다 말린스를 끝으로 지도자에서 은퇴한, 포수 출신의 제프 톨버그는 “매우 이기적인 성격조차 승부 기질로 용납받는 포지션인 투수와 대화를 가장 많이 나누는 이가 누군가. 바로 포수다. 끊임없이 달래 줘야 한다. 포수는 내·외야 전체를 지켜보며 코칭스태프의 지시를 전달하고, 때로는 돌발상황에서 야전 지도자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포지션의 특성에 대해 어려서부터 본능적으로 캐치하는 포수야말로 지도자감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종범·최희섭·서재응 등 스타가 즐비했으나 하나의 팀이 되지 못했던 KIA에서 포수 출신 조범현의 리더십은 어떤 것이었나.
 
순탄치 않았던 ‘프로야구 인생’
지난해 조범현이 KIA에 부임했을 때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KIA는 강한 컬러의 선수들이 모여 팀 워크를 구성하는 구단이었다. 해태 출신의 지도자가 아닌, ‘이방인’ 조범현이 감독으로 왔다. 우려의 눈길이 많았다. 게다가 그는 SK감독으로서 보낸 지도자 생활의 첫 시기를 실패로 끝냈다. 부임 첫해 시리즈 우승까지 넘봤으나 현대에 패했다. 단기전 승부 미숙을 지적당했다. 2006년 SK에서 해고된 뒤 이듬해 여름 KIA 배터리 코치로 광주행 열차를 탄다. 배터리 코치로서의 능력은 한국 야구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김성근(SK 감독)으로부터 고교 시절부터 혹독히 훈련받은 덕분이다. 대건고 시절 그를 충암고로 전학시켜 77년 창단 첫 우승을 일궈 낸 감독이 김성근, 그해 봉황대기 최우수선수(MVP)가 바로 조범현이었다.

그의 야구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프로 원년인 82년 OB 소속으로 한국시리즈 우승 때 마스크를 쓰고 투수 박철순과 포옹을 나눈 이는 입단 동기 김경문(두산 감독)이었다. 조범현은 하위 팀 쌍방울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자신보다 1년 늦게(2004년) 프로 감독 생활을 시작한 김경문은 2군 선수, 백업 선수가 강한 팀 컬러를 만들어 두산을 부임 이후 매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김경문은 지난해 9전 전승 우승 금메달 신화(2008베이징 올림픽)의 영광까지 일궈 냈다. 프로 원년 주전 경쟁을 하던 입단 동기의 격차는 이렇게 크게 벌어진 듯했다.

실력보다 패배의식이 문제다
그러나 위기는 그에게 일상이다. 4번 타자와 에이스에게 승리의 영광을 돌리는 자신의 포지션 그대로 그는 위기와 뒹굴며 KIA를 부활시켰다. 자신보다 더 패배의식에 빠져 있던 선수단을 탈출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그는 애초부터 ‘KIA 자동차’에 자꾸 해태 정신을 채색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 드래프트를 통해 타지에서 온 젊은 선수들이 대부분인 팀으로 바뀌었다. V9해태, V9 KIA를 외쳐 봤자 오늘 패하고 내일 지면 무소용이라는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시즌 내내 다그치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최희섭이 부진할 때 김상현을 믿었고, 한기주가 불안해 마무리에서 탈락하자 과감하게 유동훈 카드로 바꿔 성공했다. 시리즈를 앞두곤 구위가 떨어진 고참 서재응을 엔트리에 포함시켰다. 스승 김성근에게 배운 데이터 야구가 그의 장기였지만 데이터보다는 선수를 더 믿었다.

한국시리즈 일전을 앞둔 선수단 미팅. 그는 “못 치고 못 던지고, 실수를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이긴다. 지금까지 얼마나 잘해 왔는가. 해 온 대로 한다. 반드시 우승한다”고 말했다. 시스템의 야구, 선수단 전원이 주전-비주전을 가릴 수 없을 만큼 격차가 없는 SK는 수년간 한국 야구의 해답이었다. 이 최강팀과 단기전 승부를 하기 위해선 힘과 기술보다 자신감이, 그리고 사람이 더 중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사설종교 지도자처럼 ‘우주의 기운이 KIA를 감싸고 있다’는 말도 꺼냈다. 수십 년 전 고교 무대. 1-0으로 앞선 9회 말 자기 팀 에이스에게 다가가 뜬금없는 농담으로 투수의 굳은 어깨를 풀어 줬던 그때처럼.

포수 출신의 감독 조범현은 투수 출신의 스승 김성근을 넘어섰다. 고교 시절 사인 맞히기 게임을 하며 데이터 야구 수업을 하던 조범현이 더 강력한 데이터, 사람을 믿고 승리한 것이다.

김성원 기자 rough197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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