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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시민단체, 그 빛과 그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국 비(非)정부조직(NGOs)의 대명사였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새로운 총장체제로 재출범, 오랜 내홍(內訌)을 마감했다. 그리고 한 비정부조직이 정부보조금을 유용한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이래 저래 비정부조직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따갑다.

비정부조직이란 말 그대로 정부와 시장의 밖에 있는 사회단체를 지칭한다. 따라서 비정부조직은 정부와 기업의 활동에 대해 거의 무한한 감시와 비판의 자유를 갖는다.

정치권력 혹은 경제권력과 대비되는 제3의 '시민권력' 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비정부조직의 최대 수단은 단연 여론정치와 직접행동이다.

여론정치란 시민사회에서 공론(公論)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정부정책과 기업운영에 압박을 가하는 '영향의 정치' 를, 직접행동이란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시민의 의지를 관철하는 행위를 말한다.

금융실명제 실시나 동강 살리기 운동이 여론정치의 대표적인 성과였다면, 소액주주운동과 국정감사모니터 활동은 직접행동의 모범적인 渶袈?지목할 수 있다.

이러한 비정부조직의 활동은 공공선(公共善)을 추구하는 개혁적이고 점진적인 사회운동을 부각시켜 국민을 정치적으로 계몽하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둬왔다. 무엇보다 비정부조직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초연한 도덕적 상징으로 커다란 신뢰를 받아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비정부조직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왜일까. 원인은 바로 그 성공의 비결 속에 있다. 이제까지 비정부조직은 상층 핵심부를 중심으로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언론을 통해 이를 여론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어떤 조직이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가 활력을 잃으면 의사결정 과정에 동맥경화증이 나타나는 법이다. '시민 없는 시민운동' 이라는 일각의 지적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또 정부와 시장 비판이라는 비정부조직의 목표는 권력과 화폐의 유혹을 불러들이기 쉽다. 정부의 감시자이자 회계사로 '건강한 긴장관계' 를 유지해야 할 비정부조직이 거꾸로 정부의 회계감사를 받는 아이러니가 이를 증거한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연륜이 짧은 데다 몇몇 저명한 활동가를 제외하고 대다수 사람들이 대가 없는 희생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곳이 비정부조직이다.

재정문제는 쉽게 말 못할 또 다른 고통이다. 자발적인 회비와 후원금만으론 재정을 꾸려가기 어려워 월말이 되면 상근자 급여부터 걱정해야 하는 게 저간의 형편이다.

비정부조직의 활약에는 누구나 쉽게 박수를 치고 성원을 보낸다. 하지만 선뜻 회원이 돼 직접 참여하는 데는 여전히 인색한 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정부조직이 1987년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한 기둥을 이뤄왔음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정치개혁은 물론 경제정의.환경.여성.교육.언론.보건.교통.소비자.부정부패 추방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동시다발로 이슈화해 민주주의의 사회적 지반을 확대해 왔다.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21세기 한국사회의 주요 과제라면, 이는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결합할 때 성취될 수 있다.

비정부조직은 바로 이 참여민주주의의 첨병이자 보루다. 이러한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하기 위해 한국의 비정부조직은 다음의 과제들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첫째, 여론정치 이외의 캠페인.교육프로그램.입법요구.정책 대안 제시 등 다양한 행동수단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

둘째, 위계적인 조직방식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네트워크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자발성과 개방성.다양성은 참여민주주의의 젖줄이기도 하다.

셋째, 정부와 시장을 일방적으로 비판할 필요는 없되 그렇다고 견제와 감시의 거리를 줄여서도 안된다. 비정부조직은 정부정책을 홍보하는 관변단체가 아니라 '풀뿌리 시민사회' 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조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비정부조직의 최대 무기는 권력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도덕성 그 자체다. 조직운영과 활동의 투명성이 비정부조직에 대한 신뢰의 원천임을 늘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비정부조직의 역할이 갈수록 증대할 것은 자명하다. 사회조직들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자율성이 증가하는 것은 세계사회의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이런 사회조직들을 정부가 모두 관리해야 한다거나 시장원리에만 내맡겨야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사회 없는 국가와 시장' 이란 '인간 없는 국가와 시장' 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비정부조직의 갱신과 개혁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美ucla교환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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