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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자살] 美 '죽음의 권리' 논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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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무런 치료희망도 없이 심한 통증으로 고통받는 말기환자에 대한 '안락자살(安樂自殺)' 논쟁으로 미국이 떠들썩하다. 미 오리건주는 말기환자가 의사에게 극약을 처방받아 스스로 복용해 자살할 수 있게 하는 존엄사(尊嚴死)법을 97년 10월부터 시행해왔다.

지난해만 15명의 말기환자들이 이 법을 통해 합법적으로 극약을 삼키고 고통을 마감했다. 이에 대해 미 의회 공화당 의원들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미 연방 하원은 지난 10월 27일 '인간생명에 대한 존중' 을 표방하며 극약을 자살용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금지해 존엄사법을 무력화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최종 결재를 앞두고 오리건주측은 상원을 강력히 비난하며 존엄사법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미 LA 타임스는 지난 3월 안락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환자를 8개월간 추적해 14일자에서 대형 특집으로 다뤘다. 편집자

극약을 자살용으로 처방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고통경감법' 이라는 법안이 미 하원을 통과한 다음날인 지난 10월 28일 오리건주 주민들은 포틀랜드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주민들은 하원의 행동은 주의회가 확정해 합법화한 '존엄사법' 을 무시하는 횡포라고 격렬하게 성토했다.

오리건 주지사 존 키츠해버는 "만일 이 법안이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서명절차를 거쳐 통과될 경우 이에 대항하는 모든 종류의 법적 대응을 불사하겠다" 고 경고하고 나섰다. 주의회가 말기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주민투표를 거쳐 정당하게 통과시킨 법에 대해 연방정부(의회 포함)가 간접적 방법으로 실행을 막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오리건주의 일부 의사들은 "안락자살은 의학이 도저히 도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말기환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마지막 의학적 수단" 이라며 "인간이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인권유린 행위" 라고 비난했다.

이들은 만일 이 법이 최종통과될 경우 말기환자의 권리를 위해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겠다고 경고, 사태가 일파만파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헨리 하이더 의원과 돈 니클 의원을 비롯한 미 공화당 보수파 의원들의 입장도 강경하다. 하이더 의원은 "의사가 인간이 쉽게 죽음을 선택하도록 돕는 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너무 가볍게 보는 처사" 라며 "비록 주법상으로는 합법이지만 연방 의원으로서 이를 무력화시키는 법안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 고 밝혀 오리건주 주민들과 평행선을 달렸다.

클린턴 미 대통령은 아직 이 법에 대한 입장을 유보하고 있어 사태는 유동적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조치를 취하든 안락자살 문제는 다음 세기까지 이어질 미국사회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될 것이라고 LA 타임스는 지적했다.

존엄사법은 1994년 11월 주민투표에서 51대49로 통과됐다. 이 법은 '죽음의 권리' 라는 시민단체가 앞장서 주민 입법청원을 하면서 마련됐다.

'죽음의 권리' 는 부인이 암으로 극심하게 고통을 겪다 사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앨 시나드라는 시민운동가가 말기환자가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며 93년 7월 결성했다.

▶ 안락사와 안락자살

미 오리건주가 94년 주민투표를 통해 확정하고 97년 10월 27일부터 발효된 존엄사 법은 말기환자가 고통을 줄이기 위해 과량복용시 치명적인 의약품을 의사의 협조 아래 대량으로 처방받아 스스로의 손으로 복용하는 안락자살을 골자로 하고 있다.

안락자살은 말기환자들의 고통경감이라는 목적과 이를 위해 환자가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는 안락사(安樂死)와 같지만 최후에 이르게 하는 약품을 몸에 투여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에서 큰 차이가 난다.

안락사에서는 의사가 말기환자에게 극약을 직접 주사해 사망케 하지만 안락자살은 의사가 약을 처방만 할 뿐 환자가 이를 몸에 투여하는 과정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안락자살은 의사가 처방해준 극약을 환자가 남의 손을 전혀 빌리지 않고 자기 손으로 복용해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의사의 윤리에 관한 논쟁에서 안락사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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