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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출입업소 비상구가 없다] 하. 놀이공간 부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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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아이들은 절대 불량 청소년이 아니었습니다.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고 성적도 좋았어요. " 인천시 중구 인현동 화재참사로 5명의 학생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인천여상 3학년 2반 담임 권경순(權敬純.42)교사는 2일 "비명에 간 제자들이 단지 술집에서 죽었다는 이유로 '탈선 10대' 라고 매도하지 말아달라" 고 말했다.

제자들의 시신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영안실을 나서던 權교사는 "이번 비극은 안전시설도 갖춰놓지 않은 채 아이들에게 술을 판 못된 어른들, 아이들을 올바로 이끌지 못한 나 같은 스승들의 잘못 때문" 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權교사의 말처럼 이번에 희생된 10대 대부분은 탈선.불량 청소년이 아닌 '보통 학생들' 이었다. 왜 보통 학생들이 술집으로 향하고 있는가. 그들을 이용해 돈을 챙기는 이들은 누구이고 그것을 용인하는 사회구조는 어떤 것인가.

55명의 어린 목숨을 빼앗아간 참사를 계기로 한국 사회의 청소년 문화 전반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 청소년 문화공간이 없다淪?교육체계가 급격히 변화하는 청소년 문화를 적절히 수렴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심각한 반성이 교육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집에 있으면 공부하라는 말뿐이잖아요.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저녁엔 친구들과 PC방이나 노래방엘 자주 가요. 친구 생일 같은 날엔 호프집은 물론 소주방도 종종 갑니다. " 1일 밤 서울 신촌의 한 PC방에서 만난 여고 2년 李모(17)양의 말이다.

"달리 갈 만한 곳이 있느냐" 고 되묻는 李양은 "힙합 댄스나 랩.테크노 같은 음악에 관심이 많지만 특별히 배울 만한 곳은 없다" 며 귀찮다는 듯 말한 뒤 다시 인터넷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열중했다.

한국 사회에는 청소년들이 환호하는 새로운 문화를 끌어안을 만한 열린 공간이 없거나 터무니없이 비좁다는 말이다.

'체벌.촌지 시비로 인한 교권 추락이 학생지도에 공백을 불러 이런 참사를 낳았다' 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체벌이나 엄한 학생지도 등의 부활에는 많은 교육계 인사들이 반대한다. 신세대에 맞는 새로운 학생지도 방식이 출현해야 한다는 시각이다.

전교조 현원일(玄源一.면목중 교사)학생생활국장은 "체벌이나 엄격한 생활지도의 강화는 학생들의 반발만 부를 뿐 근본대책이 될 수 없다" 며 "교내외에 문화.예능시설과 강좌를 만드는 등 청소년들의 욕구를 공개적으로 끌어안을 방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야 할 때" 라고 말했다.

◇ 공무원 결탁 악덕업자 척결해야〓이번 기회에 청소년들에게 술을 팔고 유흥을 제공해 이득을 챙기는 일부 악덕 유흥업자들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여론도 많다. 대형 참사를 낸 '라이브Ⅱ 호프' 는 10대 전용 술집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게 학생들과 주변 업소들의 얘기다.

사고가 나자 잠적해버린 업주는 비슷한 가게를 몇개씩이나 운영하며 경찰.관계공무원 등의 비호 속에 중.고생을 상대로 돈벌이를 해온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 호프집처럼 관계공무원들과 돈으로 검은 연결고리를 맺고 10대들을 '손님' 으로 돈을 버는 악덕 유흥업자들이 전국 곳곳에 널려 있다. 엄격한 처벌 규정을 담은 청소년보호법이 발효됐지만 '법 따로 현실 따로' 인 상황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 청소년종합상담실 이규미(李揆美)실장은 "법과 제도의 강화가 전부가 아니다. 어른들의 의식 변화가 선결문제" 라고 지적했다.

李실장은 "콜라텍 등 청소년 이용시설을 청소년의 문화 욕구를 채워줄 건전한 공간으로 이끌고, 유흥주점에는 청소년들이 출입할 엄두를 못내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고 강조했다.

◇ 가족간 대화 부족〓통계청이 지난해 10월 4년마다 실시하는 정기 국민생활 실태조사의 하나로 전국 3만여 가구의 15세 이상 청소년 7만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누구와 고민을 상담하느냐" 는 물음에 '친구' 를 꼽은 청소년이 56.4%로 가장 많았다. '스스로 해결한다' 가 16.8%인 반면 '부모' 라고 답한 청소년은 12%에 불과했다.

94년 조사 결과(친구 53%, 부모 14.3%)와 비교할 때 친구는 3.4% 늘어난 반면 부모는 오히려 2.3% 줄어들었다. 가족간 대화가 줄어들면서 청소년들이 가정 밖으로 겉돌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수치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이시형(李時炯)박사는 "가족 구성원간 대화 부족이 낳은 오해와 갈등 때문에 비극적인 상황을 맞는 청소년들이 많다" 며 "가정내 대화라는 고전적이고 원론적인 답변이 결국 청소년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열쇠" 라고 강조했다.

최재희.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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