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바람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10여 년 전 외환위기 때도 이미 경험했다.
1998년 OB맥주엔 벨기에 측 합작사인 인터브루 출신 사장이 취임했다. 독일 코메르츠방크와 합작한 외환은행도 외국인 임원을 선임했다. 잦은 항공기 추락 사고로 99년 미국 국방부의 탑승 금지 항공사로 지정될 만큼 위기에 몰렸던 대한항공은 2000년 초 조양호 회장보다 더 높은 연봉을 주고 미국 델타의 운항본부장을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재계는 곧 외국인 전문경영진 시대가 올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왜일까.
답은 간단하다. 당시 외국인 임원과의 동거가 대부분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대한항공만 말콤 글래드웰의 베스트셀러 『아웃라이어』에 소개될 정도로 비교적 성공했고, 나머지 기업들엔 외국인 인재 영입을 계기로 기업의 체질을 바꾸는 ‘히딩크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삼성전자와 LG전자·기아자동차 등 외국인 임원을 영입한 기업들은 대부분 최악의 금융위기 와중에도 뛰어난 실적을 냈다. 외국인 임원 한두 사람이 낸 성과는 아니지만 이들이 일정 부분 기여했다.
지난해 1월 LG전자에 영입된 토머스 린튼 부사장(CPO·최고구매책임자)은 사업부별로 원자재·부품을 구매하던 것을 전사적으로 통합하는 혁신을 단행했다. 올해 3조원 비용 절감 목표 가운데 1조원을 린튼 부사장이 책임지고 있는데 목표를 초과 달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회사 직원들은 사내 의사결정이 빨라진 데 대해 놀라고 있다.
이 회사 글로벌 구매전략 그룹 소속 관계자는 “린튼 부사장이 먼저 찾아와 의견을 묻고 의사결정을 해 주니 업무 처리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때 한국에 온 외국인 임원은 ‘점령군’이거나 ‘간판용’ 성격이 강했다. 투자 지분만큼 권리를 행사하려 하거나 얼굴 빌려주고 연봉 챙겨가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국내 기업들이 꼭 필요한 곳에 외국인 임원을 주도적으로 영입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영입된 외국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국 임원보다 더 많이 노력한다. 2002년 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삼성전자 임원에 오른 데이비즈 스틸(43) 북미 총괄 상무는 외국인 임원으로서 한국 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로 유연성을 꼽았다. 유연성이란 다른 말로 하면 ‘한국문화 이해하기’다. 스틸 상무는 “삼성전자는 내가 자란 환경과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인 만큼 내가 사고를 유연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며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사람들과 친밀함(friendship)을 쌓기 위해 정말 많이 노력했다”고 말했다.
LG전자 1호 외국인 임원인 더모트 보든 부사장(CMO·최고마케팅책임자) 역시 “한국은 관계 중심적인 사회”라며 “인맥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이 부분을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또 “외국인인 내 눈에 좀 이상하게 보이더라도 한국에서 왜 그런 식으로 발전돼왔는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여전히 조직 내에서 외국인 임원이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헤드헌팅업체 하이드릭앤드스트러글스코리아 김재호 대표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LG전자의 파격적인 외국인 임원 영입으로 인해 내부의 동요와 충격이 매우 컸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 임원을 한두 명만 영입하면 도태되지만 한꺼번에 많이 영입하면 하나의 세력이 된다. 거대한 글로벌 조직에 충격을 줬다는 점만으로도 일단은 성공한 셈”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취재했나=본지는 외국인 기업의 한국지사 최고경영자나 임원 등 본사 전략에 따라 잠시 한국을 거쳐가는 외국인이나 해외 동포는 제외했다. ▶기업은 상장사 임원 이상 ▶학계는 중앙일보 대학평가 20위권 대학의 전임교원 이상 ▶법조계는 10대 법무법인 변호사 ▶제프리 존스를 비롯한 장기 체류 중인 오피니언 리더 등을 분석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외국인을 모두 접촉했고 실제 100여 명을 취재했다. 관계에는 기상청 크로포드 단장, 귀화한 한국관광공사 이참 사장 외에는 거의 없었다.
특별취재팀=안혜리·이종찬·최선욱·이정봉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