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금융대란' 누가 부르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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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란(大亂)은 큰 난리다. 몇십년만에나 있을 법한 전쟁이나 가뭄.홍수 등 대재앙 때나 쓰는 말이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각종 '대란' 속에 살고 있다. 출근길 도로가 조금만 막혀도 '교통대란' , 이사철을 앞두고 전셋값이 반짝해도 '전세대란' 등 '대란' 이란 말을 서슴없이 쓴다.

대개의 경우 '반짝난리' 그때뿐이지 언제 그랬더냐는 듯 '대란' 은 이내 흔적도 없어지고 만다.

주식시장에서 종합주가지수가 몇십포인트 빠지면 '대폭락' 이라고 떠들썩하다 하루 이틀사이 급반등하면 '대폭락' 의 혼란과 긴장감은 온데간데도 없다.

이런 과장벽(誇張癖)도 분명 하나의 사회적 질환이다. 근원적으로 사회 시스템과 그 운영에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많은데다 호들갑과 '우르르' 하는 패닉(공황상태)이 여기에 가세하기 때문이다.

'대란증후군' 이라고나 할까. 어느 투자신탁회사가 11월 금융대란설을 퍼뜨린 장본인으로 지목돼 금융감독당국으로부터 엄중경고를 받았다.

극장안에서 갑자기 '불이야' 하고 외쳐대는 일은 금융시장에선 밥먹듯 한다. 작전성격의 '거짓경보' 또한 적지 않다. 그때마다 비상구로 다투어 몰려나가다간 낭패를 당한다.

투신권의 대란설은 구난(救難)신호의 성격이 강했다. 투신사들이 보유한 대우채권과 기업어음(CP)은 25조원 규모다.

11월 10일부터 대우채권의 80%까지 환매가 가능해지고, 고객들이 다투어 환매에 나설 경우 투신권은 환매자금을 마련하느라 채권과 주식을 내다팔고, 그 결과 채권금리는 폭등하고 주식은 폭락해 채권시장과 증시가 동시에 무너진다는 게 대란설의 골자다.

대우채권이 당장 휴지쪽지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년 2월까지 갖고 있으면 95%까지 환매가 보장돼 있다. 다음달 10일을 기해 대규모 환매사태가 일어날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우려하고 미리 대책을 세워달라고 당국에 보채는 것이 어찌 '엄중경고' 를 받을 일인가. 당국을 포함해 시장 여기저기서 연방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그에 따라 시장은 부단한 조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문제는 어디서 '불이야' 를 외치면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고 비상구로 내닫는 우리의 패닉성향에 있다. 이 때문에 당국의 대책은 항상 한두 박자가 뒤처지고, 허겁지겁 마련한 수습책 또한 약발을 받지 않는다.

대란설의 진원지는 바로 대우처리의 불확실성이다. 대우채권의 대부분을 보유한 투신권으로 불똥이 튀면서 투신권이 안고 있던 부실문제와 상승작용을 불러온 것이다.

채권안정기금을 만들어 대우채권을 무제한 매입해주고, 한은과 은행들이 유동성을 특별 지원한다고 해도 불안심리는 그대로다. 대우처리와 투신사 구조조정을 단칼에 해치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에 앞서 현실적으로 밟아야 할 절차가 있다.

대우자산의 실사작업이 끝나야 부실채권 규모가 드러나고, 그에 따라 손실분담원칙이 정해져야 공적자금 투입 규모도 드러난다. 미리부터 구조조정을 밀어붙일 경우 시장자체를 붕괴시킬 우려도 있다.

이런 불확실성은 어느 시장에도 있다. 문제는 이 불확실성과 위험을 관리하고 견뎌내는 내력(耐力)이 우리 시장 참가자들에게 없다는 데 있다. 정부정책이 시장에 믿음을 주지 못하고, 정책에 대한 시장의 불신이 물고 물리면서 '불이야' 하면 '나만 살 궁리' 부터 한다.

그것은 곧 '모두가 죽는 길' 이다. 시장불안심리를 잠재우는 데는 시장에 대한 시장 참가자들의 애착과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미국의 주가가 과대평가돼 있다는 잇따른 '거품경보' 는 미국증시의 가장 큰 불안요인이다. 그럼에도 다우지수 1만대가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것은 투자자들의 시장에 대한 애착과 신뢰 때문이다.

미국 가정의 48%가 주식에 투자하고 있어 국민들 절반가량이 주식시장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주가상승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공공재' (公共財)로 인식될 정도다.

단타(短打)매매나 '치고 빠지기' 보다는 기업의 미래가치를 믿고 중.장기적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거대한 부동자금이 '뜨내기' 처럼 시장주변을 들락거리는 한 시장의 안정과 기업의 자금조달은 고사하고 실물경제의 회복마저 그르칠 우려도 크다. 외국인 보유 주식 시가총액이 이미 20%를 점하는 등 국내시장에 '글로벌세력' 의 존재는 만만치 않다. 잇따른 불안장세 속에서도 이들은 고도의 투자기법으로 막대한 차익을 챙기고 있다.

언제까지 '불확실성' 과 '대책' 타령만 할 것인가. '입이 방정' 이라는 옛말도 있다. '대란' '대란' 하며 방정을 떨다 정녕 대란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할 작정인가.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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