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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비리, 처벌만으론 막을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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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환자를 바꿔치기하는 수법으로 진단서를 발급받고 말짱한 어깨관절을 탈구시켜 병역을 회피한 수백 명이 또 적발됐다. 병역비리가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정부 당국은 그동안 비리 근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병역의무는 단 하나뿐인 생명을 담보로 요구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의 가치를 가지는 신성한 국민의 의무다. 따라서 그 의무 부과는 공정성과 형평성이 훼손돼선 안 된다.

병역비리는 처벌만으로 절대 근절되지 않는다. 정부는 군대에 가지 않아도 국무총리도, 장관도 되는 나라에서 어느 부모가 외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휴학하고, 억대의 연봉을 받는 직장을 휴직하고, 과학연구소와 대학원의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다시 처자식을 부모님께 맡기고 국토방위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국가와 사회는 인식해야 한다.

국방의 의무란 외부 적대 세력의 직·간접적인 침략행위로부터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고 영토를 보전하기 위한 국민의 기본적 의무로서 그 부과는 헌법이 규정한 평등의 원칙에 의거해야 한다. 헌법재판소도 1999년 2월 결정문(97헌바3)을 통해 ‘병역의무를 이행한 것이 결과적·간접적으로 그러지 아니한 경우보다 오히려 불이익을 받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의미다’고 판시했다. 병역법 제74조 제2항엔 군입대자의 경제적·사회적 국가보상을 목적으로 ‘국가기관·지방자치단체의 장 또는 고용주는 군 입대로 휴직한 사람에 대해 입대 전 보수와의 차액에 상당하는 보수를 지급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정부는 그동안 병역비리를 방관해 왔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정부는 병역의무 부과의 공정성과 형평성 확보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병역복무를 마친 사람이 오히려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손해보도록 돼 있는 현재의 병역제도로는 또 다른 병역비리의 발생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병역의무를 성실하게 마친 사람에게 정부는 대학 장학금을 보장하고, 전공에 맞는 직장의 취업을 보장하는 등의 특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군 복무로 입게 되는 손해에 대해 경제적·사회적 손실을 보상하는 구체적인 지원방안이 뒤따라야 한다. 모병제 국가인 미국에서 불법이민자가 지원해 병역복무를 마치면 대학 입학의 특전은 물론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는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징집돼 국토방위 의무를 수행한 사람이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병역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일이야말로 정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여춘욱 병역정의실현 국민연합 대표·전 서울지방병무청장